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 7] 바타비아의 해양 감시자 Menara Syahbandar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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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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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비아의 해양 감시자 Menara Syahbandar 전망대
조은아 (역사연구팀 연구원)
‘바타비아’는 VOC에게 단순한 독점 무역의 거점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정치적 군사력을 갖춘, 제2의 네덜란드’ 를 만드는 것이었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아시아 무역을 주도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무역망의 중심지였던 바타비아는 동인도 회사의 선박을 통해 유럽인들 뿐 아니라 중국인, 인도인 등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유입되어 뒤섞인 복합 도시였다.
동인도 회사의 아시아 다른 지역들은 주로 무역 거점으로써의 역할만 하였으나, 바타비아 만큼은 정치적 군사적 힘을 통한 지배력을 갖추고 동남아시아에 네덜란드 제국령을 확장하는 기지의 역할을 담당했다. 네덜란드를 대신해 국가 밖에서의 국가로서 모든 외교 교섭과 행정, 사법, 군사력을 바타비아에서 행사하였다. .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바타비아의 도시 계획을 다시 세우고 자신들의 또 다른 네덜란드를 바타비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고르 지역에서 북부 순다 해협까지 흐르던 찔리웅 강을 곧게 펴 운하를 만들고 도개교를 축조해 해안에서 도시 안으로 드나드는 배들을 관리하고 그들을 감시했다. 정비된 새로운 강과 운하를 따라 네덜란드식 건물들을 짓고 도시 주변으로 성벽을 쌓아 주변을 방어하고 여러 민족 구성원과 계급을 구분 짓는 경계의 기능도 갖추었다. 유럽인과 일부 중국인 등 그들의 조력자들은 현재 자카르타 구시가지에 해당하는 성내에 거주했고 다른 이들은 성 밖에서 주로 종족 집단에 따라 분리되어 거주했다.
그들은 그렇게 그들을 위한 ‘열대의 네덜란드’ 를 완성해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 아래 두고 감시하기 위해
높은 전망대를 만들어 모든 것을 발 아래 두고 내려다 보았다.
< Menara Syahbandar 전망대 (사진= 꼬따뚜아 연구팀)>
당시의 시대를 보여주는 몇 남지 않은 유적지는 잘란 파킨(Jl. Pakin) 북쪽에 잘란 빠사르 이깐 (Jl. Pasar Ikan No1.)에 위치한 전망대 Menara Syahbandar (또는 룩 아웃 타워 Lookout tower, 네덜란드어로 Uitkijk)위에서 내려다 보아야 더 선명해진다.
나무로 된 좁은 계단을 올라가보자. 흰색 건물, 초록색의 창문, 붉은 지붕, 4개 면 모두에 크게 난 창문을 통하여 동서남북 어느 곳이든 관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바타비아의 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요새도 거의 흔적만 남았지만 전망대 위에서 내려다 보면 순다끌라빠와 자야카르타의 그나마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부분을 볼 수 있다.
특히 북쪽 창 아래로는 지금의 해양 박물관(Maritim Museum)과 성벽 일부, 잘란 빠사르 이깐(Jl. Pasar Ikan), 옛 순다끌라빠 선착장(Pintu Air Sunda Kelapa), 곧게 뻗은 운하와 현재의 순다끌라빠 항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모두가 당시 VOC의 가장 큰 경제 활동이 해운 무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전망대가 서 있는 진짜 이유다.
1602년 VOC가 자야카르타에서 터를 닦기 시작하고 1619년 완전한 정복을 이뤄 바타비아가 되기까지 최전방 해안선은 찔리웅 강의 지류를 따라 이어졌다. 찔리웅 강은 현재의 전망대 아래에서 왼쪽 잘란 파킨 방향으로 꺾여 내려갔었다. VOC는 바타비아를 자신들의 나라인 네덜란드를 본 따 도시를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찔리웅 강의 지류를 북쪽으로 곧게 바꾸어 운하를 만들었다. (운하의 건설로 인하여 바타비아의 최전방은 1672년에는 루아르 바탕(Luar Batang) 지역과 순다끌라빠 항구 북쪽까지 넓혀지게 되었다. )
전망대에서 순다 끌라빠 항구를 한눈에 보이도록 하여 대형 선박을 그곳에 정박하고 작은 배로 옮겨 도시 안으로 드나들게 하였다. 또 전망대를 중심으로 성벽을 쌓아 외부 침입을 막고 작은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도시로 들어오는 성문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했다.
또한 전망대 옆 성벽 안쪽으로 선박에 싣고 갈 물건을 적재하기 위한 대형 창고(현재의 해양박물관 : 일본 점령 기간 동안에는 일본 군대의 물류 창고로 인도네시아 독립 후 PLN과 PTT의 창고로 사용되다가 1976년에 이 건물은 문화재로 선언되어 1977년 7월 7일 인도네시아의 해양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개관)를 짓고, 그 성벽 밖으로 세관을 두어 세금을 걷는 등 전망대는 그야말로 바타비아의 입구를 지키는 총체적인 해양 감시탑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사실, 약 40미터, 3층 높이로 바타비아 유적지 중 가장 높은 건물인 이 전망대가 세워진 것은 1839년이다. 그 이전에는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구 VOC 조선소의 깃대에서 드나드는 배들과 신호를 교환했다. 그러나 이 전망대는 설치된 장소가 지반이 불안정한 늪지대였기 때문에 본디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엔 어려웠고, 1886년 딴중 프리옥 항구가 새로 문을 연 이후 물류창고와 경할소(일제시대), 기상 관측소 등으로 시대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었다.
전망대 1층에는 중국인들이 새겨놓은 ‘經度原點’ 이란 비문이 있는데 이는 이곳 전망대가 바로 바타비아의 경위도 원점 0’ 00’’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에서 그들의 관리 하에 바타비아의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1870년의 빠사르 이깐의 모습(전망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중 일부)>
< 전망대 1층에 있는 비문 경도원점 / 측량국 (사진= 조은아) >
전망대 관리자의 말에 따르면 세월이 흐르면서 전망대가 노후되었고 1980년에는 남쪽으로 약 2도 정도 기울었던 경사가 현재는 약 6도가 되었다고 한다. 지반이 약한 운하 위에 나무와 콘크리트로 지어진데다 잘란 파사르 이깐( JL. Pasar Ikan)으로 향하는 컨테이너 트럭의 잦은 통행에 의한 진동으로 전망대가 많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이 전망대를 ‘흔들리는 탑(Menara Goyang)’으로도 부르고 있다.
전망대는 바타비아의 가장 요충지였던 클룸버그 요새에 세워졌다.
군사력을 통해 무역을 독점하고 본래의 그들의 땅이 아닌 곳에
그들의 성과 요새를 쌓아나갔다.
사실, 이 전망대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전망대가 서 있는 이곳이 당시 바타비아의 가장 요충지였던 클룸버그 요새(Bastion Culemborg)였다는 것이다.
전망대가 세워지기 이전에도 감시와 방어의 역할은 해오던 이 요새는 현존하는 마당 한 켠의 두 대의 대포가 본래의 임무를 말해주고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현재의 모습. 왼편이 현재의 해양박물관. 앞쪽으로 메마른 운하와 세관 건물이 보인다.
오른편 뒤쪽 멀리 현재의 순다 끌라빠 항구가 보인다. (사진= 조은아) >
VOC는 설립 당시부터 정관에 무력사용권, 사법관할권, 조약체결권 등을 보장받고 있었다. 1610년에 VOC가 각 지역별 총괄 총독의 직위를 신설하고, 1619년에 본부를 암본에서 바타비아로 옮기면서, 관료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VOC는 이 관료제와 군사력을 겸비한 막강한 세력으로 바타비아를 자신들의 도시로 변모시키기 시작한다. 디에먼(Anthony van Diemen, 1636-1645) 총독은 외부 침략에 대비해 성곽을 쌓고 VOC 청사를 신축하게 된다. 1645년 지어진 이 요새는 디에먼 총독에 의해 자신이 태어난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이름을 따서 클룸버그(Culemborg)라 불리게 된다.
그 시기에 23개의 요새가 바타비아 주변에 축조되었는데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해상 박물관 앞에 남아 있는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이어진 지버그(Zeeburg) 요새와 전망대가 서 있는 클룸버그 요새 뿐이다. 클룸버그 요새 또한 바타비아 성벽의 일부분이었다.
자야카르타의 세관 자리 가까이에 지어져 1799년까지 바다로부터 드나드는 도시 입구를 지키기 위해 요새 수비대도 배치되어 있었다. 바타비아로 드나드는 모든 외국 사절 및 무역상들은 이 입구의 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또 이곳 지하에는 지하 감옥도 존재한다. 그들을 거스르는 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운하 아래에 지어진 이 어둡고 습한 감옥은 이곳에서 약 1.2Km 떨어진 역사 박물관 앞 파타힐라 광장의 우물까지 지하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노예와 죄인을 이동시키고 고문을 하는 공간임과 동시에, 적의 침입 때는 요새 아래 수문을 막아 군사 이동을 위한 통로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북쪽 요새가 점령될 경우 반대로 수문을 열어 남쪽 요새로의 진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클룸버그 요새가 완성되기 이전 이 요새 자리에서는 몇차례 큰 전쟁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인 것이 바로 마타람 술탄국과의 두 차례의 격전이었다. VOC의 승리였던 전쟁이었지만 마타람과의 전쟁 이후 VOC는 서둘러 이 곳에 요새를 짓고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그 만큼 이 요새의 위치는 바타비아 점령의 요지였고, 운하를 통한 해상 무역과 도시 보호, 도시 진출입을 관리 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점령초기부터 완벽히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단, 잘란 파킨 남쪽 운하 설비는 실패하여 아직도 현 해양 박물관 기둥으로 물이 차오른다.) 강의 지류를 곧게 바꿔 운하를 만들고 요새와 성벽을 쌓아 드나드는 모든 사람과 물건을 관리 감독하고 군사를 배치했던 그들은 전망대까지 만들어 모든 것을 발 아래 두고 관리했던 것이다.
무역을 빌미로 외부인들에게 내어준 첫 발은 그렇게 그들을 밟고 서서 완벽하게 점령하고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룸버그 요새와 관련한 전쟁의 이야기는 후편에 계속됨)
*참고문헌
A.Heuken SJ, [Historical Sites of Jakarta] 2007
Ahmad Mansur Suryanegara, [Menemukan Sejarah]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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