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12] 끝나지 않은 잔혹사 그리고 ‘역사’ 박물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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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역사 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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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잔혹사 그리고 ‘역사’ 박물관 이야기
자카르타역사연구팀장 조은아 (한인니문화연구원)
옛 자카르타, 즉 바타비아 역사의 중심에는 ‘파타힐라 광장’이 있고 그 중심에는 역사 박물관이 있다. 이 역사 박물관은 본래 시청의 용도로 지어졌으며, 시청의 역할 뿐 아니라 치안 법원, 사법 재판소, 교도소 등의 역할도 병행되었음을 지난 번 칼럼에 소개하였다. (자카르타역사연구팀 12, 15번째 칼럼 참조)
‘바타비아 시청’은 1970년 문화재 건물로 지정되고, 당시 자카르타 주지사였던 알리 사디킨(Ali Sadikin (1966~1977) ;자카르타 최장기 주지사)에 의해 시청 건물의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1974년 3월 30일,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 – Museum Sejarah Jakarta’로 개관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시청은 사법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병행하였는데, 그에 관한 에피소드 또한 무궁무진하다.
▲JL. Raya Fatahillah NO.1 에 위치한 자카르타역사박물관 전경(사진 :자카르타역사연구팀)
잔혹한 지배 세력의 발코니
사법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할 그 즈음, 시청은 늘 고통의 신음소리와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의 기도소리로 가득했다.
1670년경, 발리인 무사 운뚱 수로파티(UtungSuropati) 또한 이 무시무시한 시청 감옥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한 몇 안되는 수감자중 한사람이었다. 수로파티는 주인의 학대를 못이겨 반란을 일으키고 투옥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AdulMuis(1950)’에 따르면 수로파티는 군 장교인 주인의 딸 수산나 무어 Soesanna Moor와 사랑에 빠진다. 노예였지만 지혜롭고 부지런했던 수로파티는 주인을 도와 많은 일을 성공시켜 크나큰 수익을 얻게 해준다. 주인 장교는 그를 신임하여 운뚱(Untung – 행운)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다. 그러나 노예는 주인의 딸인 수산나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분노한 주인은 그를 시청 감옥에 가둔다. 그곳에서 탈출한 수로파티는 함께 도망친 노예들과 조직을 꾸려 VOC 군대를 공격하고, 이는 차후 자바인들과 함께 치열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밑걸음이 된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산 수산나는 노예를 사랑한 죄로 이후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불행한 죽음을 맞는다.
1732년 스리랑카의 전 네덜란드 총독 ‘페트루 스푸이스트Petrus Vuyst’ 역시 이 감옥에 수감되었었는데 그는 발가벗긴채 의자에 묶여 목을 잘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살인 마니아로 불릴 만큼 무고한 시민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악행으로 수감되었다.
또한 자와 전쟁(혹은 디포네고로 전쟁)의 패배로 네덜란드 군에 체포된 디포네고로 왕자도 이곳의 수감자였다. 1830년 중부 자바의 마겔랑Magelang에서 잡혀 바타비아로 끌려온 그는 마나도Manado로 추방되기전까지 시청 건물에서 갇혀 있었다.
칼, 교수형 혹은 원시적인 단두대와 같은 도구들로 치러지는 사형은 매달 시청 앞에서 정해진날 집행되었다. 판사들은 모두 휘장과 예복을 갖추고 사형집행을 목도하기 위해 발코니에 자리잡는다. 육중한 문과 나무 기둥으로 막아놓은 창문들, 그리고 단단한 칸막이들이 중앙에 위치한 홀들과 2층의 발코니를 구분짓고 있다. 이러한 보호 장벽과 특별 경비는 화가난 군중들과 부당함에 대한 반발심으로부터 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예방조치였다. 이 발코니에서 조금만 북쪽으로 향하면, 한때 바타비아 성이 위치했던 곳의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는 명당자리이기도 했다.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 2층에서 보이는 파타힐라 광장의 모습(사진 :자카르타역사연구팀)
법원의 판결은 시청 뒷마당에서 발표되었는데, 수감자들은 형을 받고 시청 중앙건물 입구앞 작은 광장인 ‘스타드후이스프레인Stadhuisplein’으로 옮겨진다. 만일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이라면 그 전날밤 이곳으로 옮겨지고 다음날 아침 시청의 팔각형 탑 꼭대기에 있는 종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느님께 영광) 이라고 쓰여진 이 종은 1742년에 만들어 졌는데, 아직도 그대로 종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선고를 받은 자들은 흰옷을 입은채 법정에 들어와서 신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두번째 종이 울리면 죄인들은 광장으로 끌려 나온다. 그리고 판사들은 발코니에 착석하고 종은 다시 한번 더 울린다. 세번째 종은 사형집행을 알리는 종소리이다.
18세기 시청에서의 종소리를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은 바타비아의 노예들이었다. 같은 죄를 지어도 지배자들의 잣대는 노예층에게 더 혹독했고, 바타비아의 가장 많은 인구는 노예의 신분이었고,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는 대부분은 노예들이었다.
가장 끔찍한 사형 집행으로는죄인을 여러 날꼬챙이고 찌르며 고문하여 결국 감염으로 죽게 하거나, 그 고문으로 살상욕(殺傷慾)을 수반한 심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땅에 묶어두고 커다란 바퀴를 몸 위로 굴려 죽게 하였다고 한다. 이 모든 형벌들과 고문들은 현재 Jl. Tonkol의 유료 고가도로 북쪽의 성앞의 ‘교수대광장’ 혹은 시청앞의 고요한 광장에서 행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청 앞 광장 또한 지금의 어느 나라 시청 앞처럼 공공시장과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축제의 장소이기도 했다. 또 깨끗한 식수를 길어가던 곳이기도 했는데, 본 임호프 Von Imhoff 총독의 재임시절만 해도 찔리웅강에서 벽돌로 만든 지하 파이프를 통해서 식수를 공급했다고 한다. 광장의 중앙에는 1743년에 세워진 팔각형의 작은 분수(Patung air mancur)가 서 있는데 19세기에 허물어졌다가 1973년 다시 세워 2006년까지 지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시청은 1974년 역사 박물관으로 거듭나기까지 여러 가지 다른 업무에도 충실했다.
1620년에서 1815년까지 바타비아의 민병대 혹은 시민군(schutterij)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민병대의 총독은 사법부의 총책임자였다. 민병대는 네덜란드인 사무직과 바타비아 시민들, 마르디즈커스(Mardijkers ; 노예신분에서 풀려난 바타비아인들의 집단), 그리고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동인도 회사들도 참여했다. 시청앞 광장은 이들의 훈련장이었는데, 조금 느슨한 군대였다고 기록된다. 민병대의 각 소대는 야간에 시청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있는지 경비를 섰고, 다가오는 이들에게 몽둥이질을 했다고도 한다.
바타비아, 끝나지 않은 역사 속으로
179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파산 후, 바타비아행정부를 네덜란드 정부가 넘겨받기까지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바타비아의영국 임시정부(1811~1816)의 종식도1816년 8월 이곳에서 이뤄진다.
1905년과 1913년 사이에 시의회는 시청에서 정기적인 회합을 가졌고, 1925년에는 서부자바 지방정부가 들어서 2차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바타비아시 행정부는 1913년 시청사를 떠나, 따나 아방Tanah Abang West(현재 Jalan Abdul Muis, Central Jakarta)로 이전되었고, 1919년에 다시 현재의 Jl. Medan Merdeka Selatan, Central Jakarta에 복층 건물로 지어져 현재까지로 이어진다.
2차 세계대전 중 시청은 역시 일본군이 점령하여 군 사무실과 일본 물류 집결소로 사용되었다. 2차 대전의 종전으로 일본이 물러가고 네덜란드로부터도 독립한 인도네시아는 이 건물을 1961년까지 도시군 사령부 본부로 사용하면서 서부 자바 지방 정부의 역할도 함께 했다. 그리고 1970년 바타비아 구 시청은 문화재 건물로 지정되었다.
1710년, 세 번째 시청으로 완공되어 바타비아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시청이 1974년 역사 박물관으로 재탄생하기까지 약 264년 동안 자카르타역사박물관은 침략과 전쟁, 점령한 자와 점령당한 자들의 피와 땀, 눈물 등 수 많은 역사의 산실이었다. 이곳 저곳에서 수집된 자료들에 대한 설명과 자료가 미비하고 아직 정비되어야 할 것도 많다. 하지만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은 단순히 바타비아 시대의 유물을 전시하는 장소가 아니라 자카르타의 선사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 문화, 예술 모든 것이 총 망라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1628년의 바타비아 모습(자카르타역사박물관 소장품)
역사박물관에서 화려한 색채의 그림이 방 전체를 가득 채운 곳이 있다. 바로 서쪽 건물 중앙홀. 바타비아의 VOC 시절의 서양식 성대한 파티 모습의 벽화다. 멋지게 차려입은 백인의 점령자들은 테이블 가득 음식을 차려놓고 만찬을 즐기고 그 사이로 심부름을 하는 동양인 노예들이 보인다.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는 노랑과 빨강 등의 밝은 색감으로 벽 전체를 장식한 듯 보이지만 어두운 노예들의 표정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스탠딩 배너를 통해 VOC의 주요 인물 소개도 볼 수 있다.
▲바타비아 시절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벽화가 있는 방(사진 : 자카르타역사연구팀)
자카르타역사박물관은 건축 당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청사(현 네덜란드 왕궁)를 본따 건축되었다. 그들은 풍족한 열대 자원의 땅에 자신들의 또다른 왕국을 꿈꿨다. 자카르타역사박물관의 정면에 서본다. 인도네시아 국기가 휘날리는 자카르타역사박물관 정면 상인방에는 아직도 310여년 전 새겨진 Gouverneurs Kantoor (네덜란드어 ‘총독부’)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들은 여전히 열대의 유럽을 꿈꾸고 있을까?
▲건축 당시의 암스테르담 시청과 자카르타역사박물관 비교 사진 (자카르타역사박물관 소장품
▲자카르타역사박물관 정면에 남아있는 Gouverneurs Kantoor(총독부)라 새겨진 글씨
(사진 : 자카르타역사연구팀)
*감수 :사공경
*참고문헌 : [Historical sites of Jakarta]A.HeukenSJ , [Jakarta sejarah 400tahun] Susan Blackburn, [KehidupanSosial di Batavia] Jean Gelman Taylor, [자카르타 박물관 노트] 사공경(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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