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 풍운의 섬 ‘온러스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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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의 섬 ‘온러스트’
조은아/ 한인니문화연구원 자카르타역사연구팀장
자카르타 만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 온러스트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풍파를 겪은 섬이다.
현재 온러스트로 가는 배는 마리나 안쫄(Marina Ancol), 앙께(Angke)와 지금의 수까르노 핫따 국제공항 오른편인 무아라 까말(Muara Kamal) 등 세 군데 부두에서 탈 수 있다.
이 3개의 항구 중 온러스트 섬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는 무아라 카말 항구다. 빤따이 인다 까뿍, PIK으로 불리는 지역의 수산 시장 안쪽으로 바다와 맞닿은 곳에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서 너개의 섬들이 동쪽 방향으로 보이는데 목선을 타고 30여 분이면 섬에 도착할 수 있다.
온러스트의 본래 이름은 ‘배 섬(선박 섬)’ - 뿔라우 까빨(Pulau Kapal)이다. 온러스트라는 이름은 당시 네덜란드인들과 그 섬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에게만 알려진 이름으로, 네덜란드어 Onrust, 영어로 ‘No Rest’ 혹은 ‘Busy’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온러스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정말 쉴 새 없이 바쁘게 변화를 겪어왔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OC가 자야카르타를 점령해 바타비아로 명명한 이후, 온러스트는 더욱 빠르게 VOC의 요새로서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온러스트 관리자의 집으로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사진: 사공경 2008)
(1편에 이어서)
온러스트에서 노동에 투입된 노예와 범죄자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 그로 인해 1712년, 1723년, 1735년 등에는 이 섬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1723년에는 이곳의 기술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창고에 난입해 구리, 철 및 보급품들을 훔쳤다.
이로 인해 4개의 군대가 섬으로 보내져 이들을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창고가 부서지기도 했다. 이후 섬의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가혹해졌고, 생활환경은 더 나빠졌다. 기술자들은 총독에게 청원서를 보냈지만 무시당했다.
17세기 말 18세기 초 유럽에서 전개된 나폴레옹 전쟁은 이 먼 적도의 작은 섬 온러스트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에게 멸망 직전까지 내몰리던 그 시점에 영국은 온러스트와 그 주변 섬들을 포위하고 공들여 건축한 모든 건물들을 파괴한다. 1803년 네덜란드의 DM Barbier 대령의 계획에 따라 섬을 재개발하려 했지만 몇몇 새 건물이 지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806년 또 영국의 공격을 받는다.
본국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네덜란드는 식민지의 작은 섬 상황까지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1810년 에드워드 펠로우(Edward Pellow) 제독이 이끄는 영국군의 공격으로 섬과 주변 지역이 초토화 되고 만다. 온러스트 섬과 그 주변 섬의 살아남은 건물들은 1816년 영국군이 인도네시아를 떠날 때까지 그들이 사용했다.
이후 온러스트는 부분적으로는 네덜란드 해군이, 일부는 민간 기업에서 선박 수리에 다시 사용되었지만 섬의 시설은 엉망이었고 장비도 열악했다.
1827년 반 데어 카펠렌Baron van der Capellen 남작이 바타비아의 새 총독이 되면서 이듬해, 온러스트와 주변 섬에 억류된 인도네시아인, 중국인 노동자, 죄수들을 동원하여 섬의 해군기지로서의 역할을 위해 복구 작업을 시작한다. 이 작업으로 1840년에 이르러서야 온러스트의 제 기능을 찾게 된다.
1856년에는 플로팅 도크(Floating dock)가 설치되고 1877년에는 두 개의 철 도크도 설치되었는 데 그 중 하나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크로 꼽혔다.
1868년의 어느 보고서에는 철로 만든 증기선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 증기선은 이곳에 머물며 석탄을 실었다고 한다. 매일 신선한 야채와 식수가 Pasar Ikan에서 공급되었다.
당시 1,500명의 근로자들과 300명의 수감자가 온러스트에서 일하고 일부는 숙식을 하기도 했다. 섬이 다시 활기를 띄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883년 안예르 지역의 끄라까따우(Krakatau) 화산의 대폭발로 온러스트는 물론 가까운 모든 섬들의 시설들은 해일에 휩쓸려 사라졌다.
1886년 딴중 뿌리옥에 신식 항구가 신설되면서 온러스트는 그 중요성을 완전히 잃었고 1887년 해군도 철수한다.
1905년이 되어서야 온러스트와 찌삐르(Cipir) 섬에 기상 관측소가 건설되면서 이곳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지만, 1900년대 온러스트의 운명은 대부분 유배지와 감옥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 온러스트는 전염병 환자들의 요양소로 운영되다가 1911년부터는 성지순례를 떠나거나 돌아오는 무슬림들의 출발지이자 검역소로 그 역할이 바뀌었다.
▲ RUMAH PASIEN KARANTINA HAJI 하지 검역 격리소
당시에는 해외로 나가기 위해선 배를 이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떠나는 순례자들의 건강을 체크하고 수 개월간의 항해를 견딜 수 있도록 해양기후와 습도에 적응하는 훈련을 해야 했다.
또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바타비아로 들어가기 전에 일정 기간의 격리생활을 했어야 했는데 최근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겪어야 했던 호텔 격리의 원조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 건물 당 100명씩, 35개의 숙소를 지어 한 번에 3,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던 당시 이곳의 섬뜩한 뒷담도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최고의 울라마들에게 3개월여의 종교 공부를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VOC는 이 교육에서 무슬림들이 식민지 밖의 세상에 눈을 떠 식민정부에 반항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면 격리하게 하였고, 불순 사상을 지닌 이들을 골라내어 치료 명목으로 독극물을 주사했다는 것이다.
또 검역소에서 무사히 나와 집으로 돌아간 순례자들도 늘 식민 정부의 감시를 받았으며 그들이 이름 앞에 ‘하지Haji’라는 명칭을 붙여 그들을 구분하기 쉽게 했는데 지금도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 이름 앞에는 ‘하지’를 붙여 부른다.
▲ Cipir섬에 남아 있는 대포, 뒤로 하지 검역을 담당하던 병원의 건물 잔해가 보인다.
1933년, 하지에 관한 업무가 딴중 뿌리옥 항구로 이전되고, 온러스트는 반란자들을 감금하는 수용소로 업무가 바뀌게 된다.
1933년 1월 1일, VOC는 전 세계를 강타한 경기 침체로 인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직원들의 급여 삭감을 발표한다. 이에 열악한 노동 조건 등에 대한 분노가 겹쳐 VOC 직원들의 자발적이고 우발적 반란이 동인도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 수마트라 해안에서 네덜란드 해군소속 Zeven Provinciën 해군 함정에서 발생한 반란을 ‘제7선박사건 Zeven Provinciën, Seven Ships/Kapal Tujuh’라 한다.
그 반란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온러스트에 구금하고 폭격 당한 반란선에서 사망한 23명의 반란자들은 온러스트 옆의 끌로르Kelor 섬에 묻혔다.
▲ Kelor섬, 온러스트와 함께 요새 역할을 했으며 온러스트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사진: 사공경 2009)
네덜란드 항만 의사 L.JA.Schoonbeyt는 회고록에서 당시 바타비아 만의 섬을 조사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일행이 섬 근처에서 수영을 하며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3미터 길이의 상어가 그들을 향해 헤엄쳐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카르타만에는 상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위험한 바다 동물들은 온러스트에 수감된 수감자들을 탈출을 막는 가장 효율적인 경비원으로 인위적으로 근처 바다에 풀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1939년 9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0년부터는 동인도에 살던 나찌 추종 독일인들이 수용된다. 그리고 1942년 일본이 바타비아를 점령한다. 이미 공중 전투에 능한 일본으로선 온러스트는 그 가치가 크지 않았다. 온러스트를 비롯한 주변 섬들이 더 이상 방어 섬으로서의 기능이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온러스트를 포로와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한다.
▲일본군에 의해 감옥으로 쓰였던 건물 안에 당시 상황을 표현하는 모형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에도 1949년까지 네덜란드 탈영병과 인도네시아에서 군복무를 거부한 사람들이 온러스트에 수감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승인 후 온러스트에 전염병 환자 검역소가 개설되었고, 다시 1960년 검역소는 폐쇄된다. 그리고 온러스트는 군사훈련에도 사용되고, 정치범, 거지, 부랑자들이 그곳으로 보내어졌다.
그 후 이 섬은 1970년까지 사람이 살지 않는 상태로 무인도처럼 방치되다가 관할 경찰서의 허가를 받았다는 주민들에 의해 대대적인 건축자재 채취 작업, 즉 남아있던 하지 검역소 건물들을 부수고 건축물 자재를 약탈해 가는 일이 발생한다.
▲바닥만 남아있는 하지 검역 격리소 - 온러스트
이 역사적인 섬을 구하려는 노력은 1972년 당시 자카르타 주지사 알리 사디킨이 온러스트 섬을 사적지로 지정하면서 시작된다.
현재 온러스트 섬은 찌삐르, 비다다리섬, 끌로르 섬, 에단 섬등과 함께 정부가 쁠라우 스리부 고고학 공원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부서진 건축물들의 잔해 발굴과 재건 연구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감수 : 사공경
참고문헌
Historical sites of Jakarta / A.Heuken SJ
Kawasan Bersejarah Taman Arkeologi Onrust / DKI JAKARTA 문화교육부 자료
Onrust; Saksi Pertumpahan Darah dalam Berbagai Rangkaian Sejarah / Kompasiana.com
Batavia – Onrust Island / Spiceislandsblog
Pulau Onrust / https://encyclopedia.jakarta-tourism.go.id
서부 자바의 오래된 정원 / 사공경
Kisah Pulau Onrust, Karantina Haji hingga Misteri Hantu Maria / dream.c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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