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니 문화 연구원 [칼럼] 온러스트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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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러스트를 가다
조은아/ 한인니문화연구원 자카르타역사연구팀장
새벽 동틀 무렵 아이들을 깨워 북쪽 자카르타의 작은 항구, 까말 무아라 Kamal Muara로 향했다. 까말 무아라는 PIK 지역의 빠사르 이깐 부분에 있는 항구다. 새벽 시간 분주한 빠사르에는 차와 사람이 뒤엉겨 걸음조차 쉽지 않았다. 운 좋게 생선을 사고 출발하는 어느 차의 뒷꽁무늬에 붙어 간신히 주차를 하고 항구까지 짠 물이 흥건한 빠사르를 조심조심 걸어가 본다.
생선, 고양이, 사람... 항구 주변의 당연한 풍경이지만 하천과 바다 사이에 쌓인 쓰레기 냄새와 비린내까지 범벅이 되어 여전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 까말 무아라 항구
겨우 목선에 몸을 실었다.
나의 꼬임에 넘어온 네 가족, 열 다섯 명과 우리에게 배를 소개해 준 현지 여행사 직원의 가족까지 스물 다섯 남짓한 인원이 나무 지붕 아래 나무 의자에 앉아 동행했다. 파도가 거세면 어쩌냐고 투정을 부려 준비해 준 구명조끼가 무색할 만큼 바다는 잔잔했다. 목선의 엔진 소리만 통통통통 바닷물 위를 튀어다녔다.
온러스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까말 무아라는 수까르노 핫타 공항의 동북쪽으로 자카르타만에서 가장 바다 깊이가 낮은 부분이기도 하다. 모래톱으로 그리 깊지 않은 그 바다에는 홍합 양식장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간혹 바다 중간에 대나무로 엮은 층 위에 막사를 지어 놓고 낚시꾼들에게 임대를 해주는 바닷집들이 보였다. 이 바다에서 빠지면 저기로 헤엄치면 되겠구나, 허접한 상상을 하는 동안 배는 어느새 끌로르 섬Pulau Kelor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끌로르는 모래섬으로 본래 8.5헥타르가 넘었다는데 현재는 3헥타르만 간신히 방파제 기둥과 함께 남아 있다. UN은 이 섬이 약 40년 후면 바닷물에 모래가 다 쓸려 내려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이곳은 온러스트에 가기 전에 들린 이유는 현재 유일하게 형태가 남아 있는 1850년에 지어진 요새 마르텔로Benteng Martello를 보기 위해서였다.
전체 높이 15m의 이 원형 요새에는 높이 2미터 너비 2.2미터의 대포를 쏠 수 있는 각각 8개의 창이 지면에서 3.5m 높이에 둥근 벽을 따라 나있다. 창문 사이에는 총을 쏠 수 있는 좁은 구멍들도 있다. 끄라까따우의 강력한 분화로 거의 붕괴되고 내부층만 남아있는 상태지만 포를 쏘는 이 구멍들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부서져 쓰러진 모습 그대로 땅에 꽂히듯 서있는 외벽 잔해들과 선명한 빨간 벽돌의 요새는 아직도 그 풍채가 웅장해 보였다.
▲요새 마르텔로
▲쓰러져 땅에 쳐박힌 마르텔로의 외벽 잔해
Kelor는 ‘묘지’를 뜻하는 ‘Kerkhof’라는 네덜란드어에서 나왔다. 이 섬은 요새로서의 기능도 있었지만 온러스트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공동 묘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무덤들은 바다에 의해 침식되어 눈에 띄지 않았다. 텐트를 치고 낚시와 야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지만 설마 이곳에서 밤도 보낼까 하는 섬뜩한 상상들이 스쳤다.
▲사라져가는 Kelor섬의 모래 유실을 막기 위해 꽂아둔 돌들
우리는 다시 배를 온러스트를 향해 돌렸다.
▲쪽배는 온러스트를 향해 달렸다.
이 끌로르(Kelor), 온러스트(Onrust), 비다다리(Bidadari), 찌삐르(Cipir) 등 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이 네 개의 섬 중에 온러스트는 고고학적 유산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섬이다.
1800년대 지어진 VOC의 교회는 현재 섬의 연구과 보존 활동의 정보실로 사용되고 있고, 검역소 시설 의사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은 섬 박물관으로 발굴된 잔해들과 온러스트의 연대별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검역소 시절 공동 식당이었다는 건물은 현재 직원들의 휴게실로 사용 중 이었다. 그 밖에도 요새와 하지 검역소 시절의 기초 유적, 발굴된 유적으로 재건된 풍차, 지하 공간, 감옥, 네덜란드 공동 묘지, 교각, 해안 제방 잔해 등이 남아 있었다.
1731년부터 죽을 때까지 이 섬의 족장이었던 에담 출신의 Cornelis Willemse Vogel(1695~1738), 온러스트에 도착한지 2년 만에 사망했다는 네덜란드 여인 마리아 반 데 벨데(Maria van de Velde 1721) 등 섬 한 켠에는 타국에서 쓸쓸히 죽어간 외인들 묘지가 보존되고 있었다.
비를 뿌릴 듯 말 듯 하늘을 가리고 있는 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줄이 묘지 옆 바다로 내려 앉는다. 역사 속에서도 아팠고 다 사라진 지금도 우울하고 쓸쓸함이 가득한 섬이었다.
▲찌삐르에서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아이들
좁은 바다 건너 찌삐르Cipir섬에서 바나나 보트를 타는 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왔다.VOC와 네덜란드 식민 기간 동안 찌삐르는 온러스트에서 수리 중인 선박의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후추, 커피, 향신료와 같은 값나가는 물건들이 가득 쌓여있던, 바타비아에서 가장 관리자 수익성이 좋은 곳이었다.
지금은 다 부서진 병원 잔해와 모래 속에서 파내어 냈다는 대포만이 남아있지만 얕은 해안에서 조개를 잡고, 낚시를 하고, 인도미를 팔고 바나나 보트 등의 해상 스포츠로 돈을 버는, 여전히 수익성이 좋은 섬이다.
▲Cipir 섬에 남아있는 하지 격리 병원의 잔해
오늘 아이들과 방문한 이 세 곳의 섬들은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네덜란드를 둘러싼 유럽의 역사까지도 얽히고 설켜있는 쉽지 않은 역사의 현장이다. 이 부서지고 사라져 쓸쓸한 이 섬은 남아 있는 잔해만으로도 파란만장했던 이곳의 역사가 가슴에 무겁게 와닿았다.
아이들이 이 섬들의 굴곡 심한 역사를 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이 섬들의 중요하다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해 주길 바랄 뿐이다.
돌아오는 뱃길은 더 조용하고 잔잔했다.
▲바다에서 바라본 자카르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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