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문학상 일반 최우수상 / 구눙 살락 / 이혜경 > 한인니 문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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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문화 연구원 제9회 문학상 일반 최우수상 / 구눙 살락 /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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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기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092회 작성일 2018-10-1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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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회 문학상 일반 최우수상 재인니 한인회장상 >
 
구눙 살락(Gunung Salak)
 
이혜경 / JIKS 교사
 
 
멍든 곳을 세어 본다. 하나, 둘, 셋, 넷, 족히 열이 넘는다.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나 자신이 대견하기만 하다. 오르는 내내, 내리는 내도록 곡소리 멈추지 못했다. 발은 천근만근이었고, 어깨는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소음을 다 받아준 일행의 인내과 배려에 새삼 감사할 뿐이다.
 
벼르고 벼르던 구눙 그데(Gunung(산) Gede)를 아껴두고 살락을 먼저 올랐다. 그데가 2,985m임에 비해 살락은 2,211m이니 사실 쉽게 보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새벽 3시30분 일어났을 때, 카풀을 약속한 현웅씨와 만나기로 한 시각이 1시간여 남았다. 넉넉히 준비해도 되겠구나 싶어 이불 속에서 몇 번 더 뒹굴 거렸다. 눈 떠서 그냥 벌떡 일어나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운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느릿느릿 무겁게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있었다. 아뿔싸, 배낭을 다 싸기도 전에 ‘도착해서 집 앞’이라는 카톡 문자를 받았다. 서두르며 뒤숭숭하게 문 밖을 나선다. 약속이 있을 때마다 쫓기는 일 없게 살자고 다짐을 하건만, 매번 이렇게 발끝에 일이 닿고서야 허둥대며 후회를 한다.
 
차에 올라 비몽사몽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1차 집결지인 찌아위 톨(Ciawi tol) 휴게소에 도착해 있다. 처음 보는 분, 두 번째 보는 분, 최회장님, 탁총무님 속속 모여 들어 가볍게 인사 나누고 2차 집결지이자 산행의 시작점인 찌다후(Cidahu)로 힘차게 출발한다. 세 대로 나눠진 차량들이 비상등을 켜고 ‘우리는 한 팀이요’ 하면서 신나게 살락으로 향한다. 적은 수이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단체 행동은 뭔지 모르게 그럴싸한 흥분이 있다. 모르긴 해도 기사들의 기세에도 그런 재미와 비장함이 비친다.
 
찌다후, 6시 이른 시간이어선지 가게도 닫혀있고, 곁달린 화장실도 잠겨있다. 열어 보려고 무진장 애쓰는 승기씨, 일반적인 요의나 변의 그 이상의 고통이 있어 보인다. “풀숲으로 내려가 해결해”라는 총무님의 친절한 안내를 짐짓 무시하며, 잠긴 화장실 문을 꼬챙이로 쑤셔도 보고 비틀어도 보면서 어지간히 힘을 쓴다. 올라갈 산길이 먼 데 벌써부터 저리 힘을 빼서야 되겠나 싶은 애처로움마저 든다. 총무님 말을 굳이 외면하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는지 회장님이 ‘뒤풀이 장소로 예정된 자바나 스파(Javana spa)에 화장실이 있을 터이니 그쪽으로 이동해서 해결하자’고 제안하신다. 뒤에서 관망하던 이들도 여기저기서 “그게 좋겠네” 하며 맞장구를 쳐 주신다. 스파에 도착했을 때, 총무님을 제외하고 너나없이 화장실로 향한다. 승기씨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눈들이, 사실은 나름 꿍꿍이가 있었던가?
 
스파에 올라 해결할 일을 해결하고 나니 일행 전체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고 활기차다. 배변의 욕구가 해소된 이 편안함,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기본욕구가 해결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출발하기 전, 뒤쪽 살락 능선에 피어나는 안개와 갓 올라온 청량한 햇살에 환성을 지르며 사진 몇 컷 남긴다. 현웅씨의 사진기가 최신식이라, 아니 핸드폰이 최신식이라 저번 트래킹에 이어 이번에도 사진사 노릇을 할 량으로 보인다. 발도 빠르고, 손도 빠르고, 눈치로 빠른 참 건강한 사람이다. 젊음도 부럽지만 그것 말고도 참 좋은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스파에서 1번 등산 목까지는 30여분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책로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어도 이런 저런 이야기꽃 피우기에 부담이 없고, 식어 있는 몸에 살짝 열기를 넣어주는 워밍업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그렇게 웃으며 한가히 오르면 유황냄새 풍기는 멋진 경치의 분화구(까와, kawah)와 보기만 해도 그 높이가 아찔한 정상(puncak)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거기에 1번 등산 목이 꽂혀 있다. 그 갈림길에서 지난번에는 좌측 길, 분화구로 향했다. 완만한 트래킹 코스로 왕복 9시간이 걸렸었다. 이번엔 우측 길, 정상으로 향한다. 왕복 10시간으로, 해지기 전에 정상을 찍고 돌아오는 것이 목표다.
 
자 이제 시작이다.
겨우 2,211미터일 뿐이니 내가 겁먹을 필요 없다. ‘고작 2,211이다. 두렵지 않다. 할 수 있다. 5킬로만 오르면 정상이다.’ 자꾸만 되뇌는 걸 보니,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가 보다. 돌계단 얼마 안 올라 오늘 산행이 정말 힘들 것 같다는 직감이 발바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등산화가 20년도 넘은 것이라 지난 번 트래킹에서 무척이나 힘들었다. 횟수로 따지자면 몇 번 신지 않아 위쪽은 멀쩡하지만 바닥은 온전치 못한 듯했다. ‘등산화도 5년이 넘으면 미끄럼방지 기능이 다 닳는다.’는 산행 선배님들의 고견을 받아들여 기쁜 마음으로 식모에게 선물로 줘버렸다. 그리고 어제 끄망 리포몰에서 오늘을 위해 거금을 투자해서 새 등산화를 샀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인가, 저번 신발보다 더 미끄럽다. 성치 않은 무릎 연골이 오늘부로 다 망가지게 생겼다. 미끄러질 때마다 ‘큰일이네, 큰일이네’ 머릿속이 하예지고 있었다. 전부 9명인 일행 중에 여자는 단 두 명, 한 명은 아직 서른도 안 된 처녀이니 말할 것도 없이 무릎은 성할 터였다. 힐끗 보아하니 등산화도 좋아 보인다. 내가 문제이다. 오가는 등산객은 우리가 유일한 것 같다. 가다가 포기하면 어떤 지점에 혼자 앉아 일행이 돌아오길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 내가 너무 느린데 포기하지 않으면, 나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기 힘들 수도 있다. 등산 시작하고 1시간가량 지났을 무렵부터 정상에 오를 때까지 이 걱정을 짊어진 채, 미끄러운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다음 걸음으로 옮기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지리산 종주 두 번, 설악산 종주(설악산은 종주라 하기에는 코스가 다양하지만) 두 번, 그리고 웬만한 산은 다 올랐다. 여자 치고도 작은 축에 속하는 나는 짧은 다리로도 굳건히 다 해내어 왔다. 올라갈 때는 항상 힘들었지만, 내려올 때는 거의 날아서 내려왔다. 오르고 내리는 걸음의 속도가 너무 달라서 같은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나는 내려가는데 능했다. 한 발 딛을 때 다음 발 딛을 곳을 눈으로 감지하고 사뿐히 내려놓자마자 다시 다음 발을 가볍게 디디며, 걷는다는 표현보다는 난다는 표현을 하고 싶게 스스로 느끼는 몸의 가벼움을 즐기며 산을 탔었다.
 
그때는 그저 젊어서 그랬는데, 그때의 몸은 없는데 그때의 기억만을 가지고 이런 모험을 감행했나 보다. 무리였다. 심장과 폐도 죽겠다 난리고, 무릎 연골 닳는 소리에, 엉덩이 근육은 오랫동안 안 하던 운동하느라 비틀어질 것 같았다. 출발한지 1킬로쯤 지나자 오르막의 각도가 달라진다. 45도는 오르막도 아니다. 60도 정도이면 고맙고 아예 80도, 90도까지도 가늠된다. 그래도 올라오라고 곳곳에 매듭 줄이 메어져 있고, 땅 밖으로 나온 나무뿌리가 ‘나를 잡고 올라오시오’ 유혹한다. 오르면서, 다 오르기도 전에 내려갈 길이 한없이 걱정되는 길이었다.
 
 
 
등산 목의 숫자가 보이는데, 1부터 2, 3, 4 이렇게 차근차근 보이는 것이 아니라 1 다음이 7, 7 다음이 12,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가고 오는 중에 일행들의 논란이 있었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높이인가 아니면 몇 미터 거리마다 나오는 건가, 아니면 우리가 짐작하기 힘든 또 다른 깊은 뜻이 있나. 하산이 거의 끝날 무렵 뜻이 한 데 모아졌다. ‘저건 분명 100미터 마다 꽂아둔 거리목이다’ 공식적인 정의라기보다는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찾아낸 귀납적 결론이다. 아닐 수도 있다.
 
나의 신음소리는 곡소리에 가까웠다. 번쩍 정신이 들어, 소리 내는 내 꼴이 우스울까봐 이를 악물기도 하였으나, 이내 또 신음소리는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곡소리였다. 여기저기서 ‘배낭을 주세요. 그거라도 덜면 좀 나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고집을 피웠다. ‘이것도 못 들면 다음엔 안 데리고 가실까봐서 못 드리겠어요.’ 농담 반이었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이 쪼끄마한 배낭도 못 짊어질 정도면 안 따라 나서는 게 옳지, 뭣 하러 짐을 더 보태나. 신음소리가 곡소리로 곡소리가 또 신음소리로, 그렇게 5시간을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애걔걔. 뭔 정상이 이래. 옷깃을 여미는 휘황찬란한 바람과 발아래 끝없이 펼쳐진 멋진 산등성이, 그리고 그 풍경을 완성시켜줄 낮게 깔린 백색 뱀 구름을 상상하고 있는 나에게 구눙 살락의 정상은 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초라했다.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올라온 정상이 고작 이리 생겼나. 한심하구나.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산 꾼들이 다녀간 쓰레기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주울 만한 큰 쓰레기는 없다. 며칠 밤을 세웠는지, 새까맣게 캠프파이어 자국 열 댓 군데에, 줍기도 안 줍기도 애매한 손톱만한 쓰레기가 평편한 정상을 온통 지저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일행들보다 20분여 늦게 정상에 도착한 탓에 발 딛자마자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점심을 해치웠다. 그런데 마지막 숟갈 입에서 빼자마자 “자, 출발합시다.” 한다. “아이구, 이게 뭐여요. 좀 더 정상을 즐기다 갑시다.” 아무리 하소연하여도 싸늘하다. ‘당신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소. 어서 어서 일어나시오’ 여덟 명, 열여섯 개의 눈이 모두 나를 향한다. 허탈함에 풀린 다리 더 힘이 빠진다. 그래도 어쩌랴, 혼자 온 것이 아니니 다수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돌아오는 길 초반에는 일행들의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잠시였지만 정상에서 밥 먹느라 휴식했고, 또 내 전공이 내리막이 아닌가. 줄잡고 내려올 때는 “제가 역레펠 한 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며 곡소리 대신 우스갯소리까지 해가며 신이 났었다. 신발만 덜 미끄러웠어도 내 전공 살리면서 훨씬 쉽게 내려왔을 터였다. 신발이 문제였다. 오르막보다 내리막에서는 더 맥을 못 추었고, 나는 발바닥 대신 엉덩이로 땅을 짚으며 내려왔다. 워낙 90도 경사로 내려오는 곳이 많아 엉덩이로 먼저 앉은 다음 양 팔로 지지하고 사뿐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으로 절반은 내려온 것 같다. 다음 날 다리가 아픈 게 아니라 어깻죽지를 못 쓸 판이었다. 내려온 팔 할은 엉덩이와 어깨 덕이다. 정말로 힘들었다. 다 왔나 싶으면 또 길이 이어지고, 다 왔다 확신하면 또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이렇게 많이 올라갔었나 싶게 길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길고 또 길었다.
 
kawah와 puncak이 나눠지는 1번 목에 도달했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해내었구나. 지금의 나라면 절대 못 해내었을 것이다. 과거의 내가 도와주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과거의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아는 것, 그것만큼 큰 힘은 없는 것 같다. 성공을 해봤기 때문에 성공을 확신하고 그 확신이 나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에너지를 부여한다는 것, 성공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다 내려왔다. 마지막 아스팔트길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히죽 이죽 웃음이 나온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서 나온 웃음일 수도 있고, 정말로 내가 대견해서 저절로 올라간 입 꼬리 때문일 수도 있다. 해내었다.
 
이제 5개월만 버티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쉰이 된다. 쉰이 되면 철도 들어 다른 사람들의 사소한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쉰이 되면 귀가 순해져 욱하는 화도 없어지고, 쉰이 되면 아이들이 더 자라 내 손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쉰이 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또 이렇게 산을 오를 수 있을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하니 내가 잃는 것 중에 가장 아까운 것은 ‘산을 오르지 못할 몸’이 되어가는 것이다. 5개월이 지나 떡국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난 뒤 쉰이 되면 오늘, 이 산행이 더 기특하게 기억되리라. 철은 안 들었지만, 몸이 성했고, 아이들은 어리지만 나도 덩달아 어려서 이 무모한 산행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사십 대의 마지막 산행을.
 
 
 
*** 최우수상 재인니한인회장상 이혜경 수상소감
 
맑고 푸른 바다만 있는 줄 알았던 인도네시아였다. 하지만 웅장하고 높은 산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 2천 미터 이상 되는 산은 부지기수고, 3천을 넘기는 산도 열대여섯 개에 이른다. 젊은 날 열심히 산을 오르내렸는데 제일 높게 올라간 산이 지리산 1,915미터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마저 2천에는 못 미친다. 그러니 자카르타 시내 아파트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이, 2,958미터의 거대한 산이라는 것을 알고는 너무나 반가웠고, 이름이 ‘구눙 그데’ 임을 듣고는 그 매력적인 이름에 가슴이 뛰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게데”산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내가 최초로 들은 이름이 “그데”였기에 나는 그냥 고집하고 싶다. 그 높이보다, 그 이름이 나를 사로잡았기에.
 
그데를 오르기 전에 살락을 먼저 올랐다. 그렇게 힘들 줄 예상치 못했었다. 너무 힘들었다는 얘기를 누구에겐가 하고 싶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기를 쓰고 올라가서 허무하게 내려오는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며칠 후면 드디어 구눙 그데를 오른다. 그렇게 힘들고 허무한 일에 나는 또 왜 가슴이 뛰는지.
 
큰 선물을 받았다. 문학상 수상이라니! 글쓰기로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해봤다. 모자란 능력에도 창피함을 무릅쓰고 낸 글에 이렇게 큰 상을 주시니 자카르타는 나에게 기회의 땅인가 보다.
수상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눈물이 나네.” 했다. 누구보다 기뻐해준 남편 일근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 구눙 살락을 함께 오르며 마지막까지 기다려주고, 이끌어주신 일행들께도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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