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남중국해 문제에 침묵하다
본문
2023년 9월 6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3차 아세안 정상회의의 일환으로 열린 제26차 아세안-중국 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창 중국 총리 (사진=아세안 홈페이지)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인도네시아는 9월 6일(수) 중국과의 권역정상회의에서 그간 첨예하게 대립하던 남중국해 이슈를 굳이 의제에 올리지 않음으로써 중국과의 새로운
대결국면 조성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자카르타포스트가 7일 보도했다.
제43차 아세안 정상회의 두 번째 날인 9월 6일, 중국, 미국 등 아세안의 주요 파트너 국가 정상들과 대표들이 권역포럼에 참여해 정치적 현안과 안보문제 등에서의 협력과 걸림돌에 대한 협의를 가졌다.
아세안의 주요 장기 이슈인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자카르타서 벌어진 정상회의에서도 계속 긴장감을 조성했다. 최근 중국이 새로운 지도를 펼치며 영토-영해 분쟁을 겪고 있는 이웃국가들의 심기를 건드린 상황에서 아세안 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인도-태평양에서 미국 군사력 배치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에 아세안 회의에 처음 참석한 리창 중국 총리는 9월 6일 아세안 정상들에게 ‘새로운 냉전을 시작할 요량이 아니라면 어느 편도 들지 말라’며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중국은 현재 아세안 회원국은 물론 인도, 러시아 등 다른 나라들과 영유권 분쟁이 있는 지역을 모두 중국영토로 표시한 지도를 최근 내놓아 해당 국가들의 반발을 야기면서도 아세안 국가들에게 입장을 분명히 하라며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정상회의에서 중국은 물론 인도네시아 역시 의장국 성명에서 남중국해와 인도-태평양 갈등문제를 대놓고 언급하진 않았다. 인도네시아는 해당 성명을 통해 “우린 상호신뢰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하며 분쟁을 심화하고 고조시킬 만한 행동에 대한 자제심을 발휘해야 힐 필요성이 있음을 재확인한다”며 아세안의 입장을 완곡히 표현했을 뿐이다.
한편 중국이 내놓은 새 지도로 인해 가장 자극을 받은 당사국인 필리핀과 말레이시아는 일련의 합동 해상훈련을 시작했다. 필리핀 해군 고위 관계자는 이 훈련이 격동하는 정세 속 해양 영토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얼마든지 도전에 대한 대응태세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필리핀 대통령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는 이번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중국의 지도 문제를 지적할 것이라고 일찍이 말한 바 있지만 한 아세안 외교관은 정상회의에 참석한 어떤 나라도 해당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의장국 성명에서 1982년 해양법에 대한 유엔협약(이하 UNCLOS)이 해양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의 합법적 테두리를 정한 것이므로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며 남중국해와 인도-태평양 문제에 대한 아세안 입장을 간접적으로 명시했다.
중국은 해당 UNCLOS 협약 서명국으로 마땅히 해당 협약을 준수해야 하나 실제로는 남중국해에서 일방적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해당 협약을 지속적으로 위반하고 있는 상태다. 중국의 새 지도로 인해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당사국은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베트남 등이다.
심리적 마지노선
선박들의 왕래가 활발한 해상무역로인 남중국해에서의 영토분쟁을 완화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남중국해 행동강령(이하 COC)을 마련하는 것에 중국도 동의했지만 그 후 20년이 넘도록 중국에 대한 아세안 국가들의 불신은 점점 더 커져왔다. 해당 분쟁해역을 통과하는 국가들의 규칙서인 COC의 내용이 아세안의 권익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26차 아세안-중국 정상회의 개막연설에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모든 관계 당사국들 사이에 신뢰가 구축되고 유지되어야만 호혜적 협력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조코위 대통령은 해당 연설을 하면서 공식 연설문 원본에 명시된 ‘국제법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문장을 일부러 읽지 않았다. 이는 중국이 국제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비난성 발언을 자제한 것이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양측이 COC 협상에 속도를 내자는 제안이 나왔는데 인도네시아측 관료들은 2026년을 해당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는 전향적인 계획을 일찌감치 세우고 있었다. 협상 완료일정에 대한 인도네시아 측의 해당 심리적 마지노선은 의장성명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정상회의에 앞서 있었던 장관급 회의에서 이 일정을 결정했고 정상회의에 참석한 아세안 정상들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고 한 외교소식통이 전했다.
실존이 달린 문제
주요 지정학적 이슈들에 대해 핵심을 찌르지 않고 넌지시 떠보며 변죽만 울리는 것은 아세안 회의의 고질적 문제다.
자카르타 소재 전략국제연구센터(CSIS) 국제관계부장 리나 알렉산드라는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알고는 있지만 그와 관련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지적했다.
리나와 다른 분석가들은 여러 아세안 국가 대표들이 중국 새 지도에 대해 반대의사를 이미 분명히 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가 중국에게 좀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리나는 “인도네시아가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UNCLOS 협약이 존중되지 않으면 실존을 위협받게 되는 해양국가다. 즉, 중국이 UNCLOS 협약을 존중하느냐 여부는 인도네시아의 실존적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남중국해 분쟁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도네시아는 현 아세안 의장국으로서 해당 지위를 다음 회원국에 넘겨주기 전, 차제에 많은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좀 더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편이 전략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란 주장이다.
퀸즈랜드 대학교 국제관계 전문가 아흐맛 리즈키 M. 우마르 교수는 인도네시아가 해양 영유권 분쟁에 있어 여전히 신중함을 우선적 가치로 두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세안의 협상력을 제고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보다 유화적 접근법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남중국해 전문가 이 마데 안디 아르사나는 중국의 주장이 불법적이라 해서 강경 대응으로 나가면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 역시 강경할 것이므로 불법임을 지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듯 반응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자카르타포스트/자카르타경제신문]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