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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인도네시아의 우먼파워 “메가와띠 수카르노뿌뜨리” 정치 편집부 2015-02-1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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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도네시아 정치계는 부디 구나완 차기 경찰청장 후보에 대한 문제로 인해 뒤숭숭하다.
 
더욱이 평소 부디 구나완과 메가와띠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기에, 조꼬 위도도 대통령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하며 섣불리 집안 교통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정치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메가와띠, 그녀는 누구인가?
 
1947년 1월 23일 족자카르타 출생 메가와띠 수카르노 뿌뜨리, 인도네시아 최초의 대통령 수카르노의 장녀로 잘 알려진 “성골”이다.
 
아버지를 닮은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정치활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대학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재를 꿈꾸던 수하르토 정권이었음에, 그녀는 뚜렷한 정치색을 띠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용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수카르노의 의지,
손은 눈보다 빠르다
 
메가와띠는 굳이 눈에 보이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수카르노의 의지를 물려받은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인도네시아민주당(PDI) 의원으로서 혜성처럼 정치계에 등장했다.
 
그러나 스나얀에 입성한 그녀는 쉬지 않고 견제세력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로비 활동을 계속했고, 그 결과 “1993년 인도네시아민주당(PDI) 총재”라는 타이틀을 가져가며 모두를 한 번 더 놀라게 하였다. 본격적으로 대통령을 향한 My Way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사실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수르야디 전 인도네시아민주당 총재를 이어 당수를 맡을 인물로 부디 하르조노를 지지했지만, 당원들의 마음은 메가와띠를 향했다. 이에 정부는 당의 결정을 무시하며 수하르야디를 끝까지 차기 당수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가와띠와 그녀의 지지자들은 당 중앙 사무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부가 확실하게 뒤를 봐주고 있던 수르야디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당 중앙 사무실을 얻을 것”이라 협박했지만, 메가와띠 세력의 굳은 심지는 꺾이지 않았다.
 
결국, 1996년 7월 27일 사달이 났다. 수하르야디 측과 메가와띠 측이 맞붙은 것이다. 메가와띠 진영 인도네시아민주당원들 수 명이 사망하거나 투옥됐으며, 소송 등 법제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기각당했다.
 
당시 이 충돌은 자카르타에서 20년 만에 가장 큰 폭동으로 꼽히며 쟁점이 됐는데, 메가와띠에게는 시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내 지지율을 높이는 계기로 발전했다.
 
국민의 지지를 받기 시작한 메가와띠 세력은 정부를 향한 투쟁을 계속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민주당은 메가와띠 측과 수르야디 측으로 확실하게 분열되어버린다.
 
민주당 당원 대다수가 메가와띠를 지지하고 국민이 그들을 지지했지만, 정부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수르야디를 민주당 차기 총재로 결정하며 메가와띠는 대통령과 멀어지는 듯 했다.
 
 
겨울 지나고 봄
 
수하르토 대통령의 겨울이 끝났을 때, 메가와띠가 이끌던 인도네시아민주당은 투쟁민주당(PDIP)으로 바뀌어 당당히 인도네시아 정치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동안 차근차근 꾸준한 성장을 이룬 투쟁민주당(PDIP)은 결국 1999년 의원 선거에서 큰 승리를 쟁취하고야 만다.
 
그리고 메가와띠 총재에게 다시 한 번 대통령을 노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으나, 당시 인도네시아 정치계를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교도 남성 정치가들의 반대로 압두라흐만 와힛 대통령과 함께 하는 부통령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메가와띠에게 다가온 봄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가? 성골 중에 성골이다.
 
2001년 7월 23일 신은 결국 메가와띠의 손을 들어준다. 부패혐의를 비롯 갖가지 문제에 휘말린 와힛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부통령이었던 메가와띠가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된 것이다.
 
비록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메가와띠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 “한 집안, 두 대통령”이라는 유일무이한 업적을 이루며 마침내 봄을 맞이한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낙화’ 중)
 
2004년과 2009년 인도네시아 대선에서 국민들의 선택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였다. 메가와띠 정부 시절 정치법무안보조정부 장관을 역임했던 유도요노는 국민과의 공감대 형성이 뛰어났다는 평을 들어 왔다. 그리고 메가와띠는 점점 역사의 편린으로 사라져가는 듯 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2014년 대선이 찾아왔다. 당시 투쟁민주당은 당 내 공식 대선 후보로서 메가와띠와 조꼬 위도도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던 중이었다. 더불어 당 외에서는 “잡음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 “결국 메가와띠가 다시 나설 것이다” 등 무차별 추측이 빗발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을 한 방에 정리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메가와띠였다. 그녀는 깔끔하게 자신의 경쟁자로 불리던 조꼬 위도도를 후보로 지지했고 투쟁민주당을 의기투합하도록 이끌었다.
 
그리하여 투쟁민주당은 2014년 대선의 승자가, 메가와띠는 “President Maker”라는 새로운 업적을 달성하며 또 다른 의미의 승자가 됐다. 다시금 그녀의 막강한 존재감이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Masih di jalan
 
메가와띠에게는 2명의 아들과 ‘뿌안 마하라니’라는 이름의 딸 1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뿌안은 그녀의 어머니 ‘메가와띠’와 생김새 뿐 아니라 정치적 감각과 재능도 매우 닮았다.
 
이에 따라 세간에서는 조심스럽게 수카르노 가문에서 3번 째 대통령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메가와띠가 아직 현역에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어 뿌안의 ‘President Maker’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메가와띠는 당장 앞에 놓인 어려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차기 경찰청장후보 부디 구나완 문제로 조꼬위 대통령과 날카로운 대립양상을 띄고 있어 쉬이 다루기는 어려울 듯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녀의 능력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인도네시아 최초 여성 대통령이자 우먼파워의 상징 메가와띠, “위대한 정치인의 딸”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이룩한 “위대한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는 그녀는 아직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다.
 
 
 
다르마 기자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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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왕뿌띠님의 댓글

바왕뿌띠 작성일

메가와띠가 재임기간 중, '아무것도 하지 않은' 가장 무능한 대통령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의견도 있는데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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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룽왕님의 댓글

와룽왕 작성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지요ㅎㅎ
누군가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상대적인건 당연한 것이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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