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꼬위 또 넘어서야 할 산…당내 ’메가와띠’ 파워 > 정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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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조꼬위 또 넘어서야 할 산…당내 ’메가와띠’ 파워 정치 최고관리자 2014-08-1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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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조꼬 위도도 투쟁민주당 대통령 당선인, 메가와띠 수카르노 뿌뜨리 투쟁민주당 총재, 뿌안 마하라니 투쟁민주당 의원. 자료사진
 
지난 7월 22일 대선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며 조꼬 위도도-유숩깔라는 차기 행정부(2014~2019년)를 이끌어나가게 됐다.
 
조꼬위-깔라는 득표율 53.15%(70,997만여표)로 쁘라보워 수비안또-하따 라자사 기호 1번 후보를 눌렀다. 오는 10월 20일 공식 대통령 취임에 앞서 조꼬위는 현재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구축해 발빠르게 내각 구성을 비롯한 정책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조꼬위-깔라의 능력을 시행에 옮길 참인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치적 지지기반이 ‘0’이었던 조꼬위에 힘을 실어준 현 투쟁민주당(PDIP) 총재 메가와띠 수카르노뿌뜨리의 영향력이 조꼬위를 흔들게 될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실제 메가와띠의 딸인 뿌안 마하라니를 중심으로 당내 세력이 결집되며 ‘신인’ 조꼬위를 경계하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투쟁민주당 내 주도권을 놓고 눈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메가와띠는 대통령직에 사연이 많은 인물이다. 메가와띠는 직선제로 바뀐 2004년 대선부터 두 차례 연속으로 육군 장성 출신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패배하며 정권 탈환의 기회를 놓쳤다.
 
그의 아버지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1950년 초대 대통령에 올랐으나 965년 군부 쿠데타로 실권을 잃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당시 군부 실세 수하르토가 1968년 2대 대통령에 오른 뒤 32년간 장기 집권하며 메가와띠는 민주화 세력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후 민주화 투쟁이 거두며 메가와띠는 1997년과 1999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당시 메가와띠는 유일한 야당이었던 민주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수하르토 정권의 개입을 받고 있어 ‘민주화 상징’으로 불리는 메가와띠의 인기를 부담스러워 했다. 민주당이 1996년 메가와띠를 두고 새로운 총재를 선출하는 당대회를 열게 된 것을 계기로 메가와띠는 투쟁민주당을 결성, 민주당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1998년 5월 수하르토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면서 인도네시아에 민주화와 자유화 바람이 불었다. 간선제 형식으로 선출된 인니 제 3대 대선에서 메가와띠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메가와띠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대통령을 꺼리는 이슬람 정서에 따라 압둘라만 와히드 대통령을 보좌하는 부통령에 선출되는데 그쳤다.
 
2년 뒤 와히드 대통령이 탄핵되며 메가와띠는 드디어 대통령에 올랐다. 그러나 메가와띠 집권 3년(2002~2004년)은 기대했던 대담한 민주화 정책을 시행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전히 군부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으로 풀이되는 부분이다.
 
이번 대선에서 메가와띠가 조꼬위를 영입하지 않았다면 투쟁민주당은 여전히 제1당의 지위를 탈환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2004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메가와띠는 유도요노 후보에게 61%대 39%로 패배했다. 2009년 대선에서는 61%대 27%로 결선도 없이 대패했다.
 
메가와띠는 이번 대선에서 조꼬위 후보의 승리를 확정하는 득표율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투쟁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의미였을까.
 
한편 투쟁민주당의 정치적 지지를 업고 대통령이 되는 조꼬위가 과연 메가와띠와 그녀의 딸 뿌안 마하라니의 협조를 잘 이끌어내어 인도네시아 정치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을 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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