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인니 수하르토 전 대통령 복권한 국민자문의회, 이에 반발하는 인권침해 피해자들 정치 편집부 2024-09-3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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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위한 희생자 연대 네트워크(JSKK)의 활동가들이 2024년 9월 26일 자카르타의 국가궁 앞에서 목요(까미산) 침묵 시위에 참여했다 (사진=안따라/Asprilla Dwi Adha)
인도네시아 국민자문의회(이하 MPR)가 수하르또(Soeharto) 인니 전 대통령의 이름을 부패에 관한 법령(TAP)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하자 이는 권위주의 철권통치를 휘둘렀던 전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고 오히려 당시 피해자들의 정의구현을 막는 억울한 상황이 될 것이란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고 자카르타포스트가 28일 전했다.
1998년 수하르또의 신질서정권이 무너진 직후 MPR이 의결한 TAP MPR No. 11/1998 법령은 모든 전현직 공직자들과 측근들, 대기업들에게 부패, 담합, 족벌주의를 폐기하고 공정하게 행동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그런 불법행위를 저지른 자들의 명단 중 수하르또 전 대통령의 이름도 명시되어 있다.
해당 법령은 무죄 추정의 원칙과 인권보호 원칙을 전제하면서도 뇌물 관행을 일소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수하르또의 이름을 해당 법령에서 삭제하기로 한 MPR의 결정은 골까르당 원내총무 이드리스 라에나의 관련 제안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골까르당은 수하르또의 32년간의 독재통치기간을 통틀어 그의 정치적 지지기반이 되었던 정당이다.
이드리스 라에나는 2006년 당시 수하르또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재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임이 공식 발표되었을 때 검찰청이 수하르또에 대한 모든 혐의를 기각하기로 한 결정을 인용했다.
이에 MPR의 밤방 수사띠요 의장은 지난 25일(수) 해당 요청을 수용한다며 골까르당에 화답했다. 그 역시 당사자인 골카르당 핵심인사 중 한 명이란 사실은 상당히 공교롭다.
해당 부패에 관한 법령(TAP)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할 것이란 밤방 의장의 발언은 사뭇 기만적이다. 수하르또 전 대통령은 이미 사망했으므로 그의 이름만 삭제될 것이라고 덧붙였기 때문이다. 이는 수하르또 한 명 만을 원포인트 복권한다는 의미다.
현 국회는 10월 1일 임기종료를 앞두고 국민들의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 온갖 논란의 법안들을 속속 강행 처리하고 있는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하르또의 이름을 부패범 명단에서 삭제하는 결정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관련 빌드업이 긴밀하게 이루어져 왔다.
MPR은 9월 25일(수) 압두라흐만 ‘구스두르’ 와히드 제4대 대통령의 2001년 탄핵명령서을 무효화했다. 이는 와히드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었던 국민각성당(PKB)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밤방 MPR 의장은 이에 그치지 않고 수하르또 전 대통령과 구스두르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려 그들을 국가영웅으로 추서하자는 MPR 차원의 의지도 함께 천명했다.
MPR은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주도의 구데타 주역들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을 탄핵해 권좌에서 쫓아낸 1967년 탄핵법령도 취소했는데 이는 쁘라보워 수비안또 국방장관의 대통령 취임을 불과 몇 주 앞 두고 그의 장인이었던 수하르또 대통령 복권을 위한 사전 빌드업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9월 9일 당시 밤방 MPR 의장은 공식적으로는 전국적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가 차원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수까르노 전 대통령의 복권을 의결했다고 천명했다.
피해자들에 대한 모독
MPR의 수하르또 복권 결정은 즉각적으로 인권 운동가들의 격렬한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국제사면위원회 인도네시아 지부장 우스만 하미드는 이를 과거 위정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MPR의 결정이 개혁시대가 맞은 패배이자 매우 좋지 않은 선례라고 규정하며 수하르또 정권 당시 벌어진 부패, 환경파괴, 인권침해 문제들이 아직 모두 해결되지 않은 상태임을 상기시켰다.
국제사면위원회는 1998년 수하르또 하야 당시 수하르또 본인과 그 가족들이 30년 넘는 기간 동안 300억 달러(약 38조 원) 상당의 축재를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서슬 퍼렇던 신질서 정권이 물러난 지 2년 후인 2000년부터 수하르또 전 대통령을 기소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나 수하르또 측은 법정에서 의사를 통해 당사자의 건강상 이유를 들어 재판 속개가 어려움을 계속 주장했고 결국 2006년 검찰 측이 이를 수용해 수하르또의 혐의를 모두 기각하면서 그에 대한 수사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같은 군 출신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제6대 대통령 재임기간 중 벌어진 일이다.
우스만은 MPR이 수하르또의 복권에 그치지 않고 국가영웅 추서를 제안한 것에 대해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 인권 침해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은 피해자들을 멸시하는 행위라고 직격했다.
수하르또는 과거 군 시절에도 여러 건의 인권침해사건에 연루되었고 그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같은 성격의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 가장 심각한 사건은 최소 50만 명 이상의 인도네시아 공산당 조직원 또는 옹호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1965년에서 1966년 사이 사냥당하듯 마구잡이로 학살당한 이른바 ‘인도네시아 대학살’이다.
또 다른 학살사건이 1984년에도 벌어졌다. 당시 빤짜실라 이념을 유일한 국가이념으로 내세우던 신질서 정권에 반대하며 북부 자카르타 소재 딴중쁘리옥(Tanjung Priok)에서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 수십 명이 공권력에 목숨을 잃었다.
2006년
모든 혐의의 기각 결정이 난 후 수하르또 전 대통령은 부패 혐의는 물론 인권침해 혐의에 대해 어떠한 재판도 받지 않은 채 2008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1965년 공산주의 연루 혐의로 체포된 어머니를 가진 스리 나스띠 루끄마와띠는 MPR이 해당 법령을 고쳐 수하르또를 복권하면 국가의 유력인사들이 저지른 부패 사건에 대한 처벌을 감경하거나 면제하는 문화가 만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명백한 독재자이자 범죄자에게 벌을 주진 못할 망정 국가영웅으로 추서하겠다는 MPR의 입장에 피해자들이나 유족들은 황망할 따름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생존자로 1965 학살피해자연구재단(YPKP65) 회장인 벳조 운뚱(Bedjo Untung)은 이번 MPR의 결정은 개혁운동에 대한 배신이라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학살당하거나 체포되어 고초를 당한 민초들 수백만 명과 연좌제에 휘말린 피해자 가족들의 운명을 옥죄고 아직까지 그들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금지법령에 대해서는 MPR이 그 유효성 폐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제고하지 않았다며, 당시 정권의 최정점에서 대학살을 직접 조장하였거나 최소한 대학살을 막지 못한 수하르또만 복권시킨 결정의 형평성 문제를 지적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금지법에 따라 공산당과 연관되었던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 친지들까지 공직에 오르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군경, 공무원 임용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었다.
국제사면위원회의 우스만은 수하르또의 이름을 부패자 명단에서 삭제해 그를 복권시키는 것은 그간 인권운동가들의 노력과 인권침해 피해자들의 권리회복을 위한 투쟁에 재를 뿌리는 행위라고 성토했다.
그러나 MPR 결정에 대한 비판을 들은 골까르당의 로드윅 프레이드리히 파울루스 의원은 국민들에게 ‘제발 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촉구하며 나섰다. 그는 MPR의 결정에 하등의 잘못이 없다는 입장이다. 수까르노도, 구스두르도 복권했는데 이제 수하르또의 복권은 당연한 수순이란 것이다. [자카르타포스트/자카르타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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