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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수라바야의 일명 `귀신의 집`, 실상은 문화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건물 문화∙스포츠 편집부 2023-02-1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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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바야 소재 ‘귀신의 집’(Gedung setan).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 건물에는 최소 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 (사진=드띡닷컴/ Esti Widiyana) 


인도네시아 두 번째 대도시인 수라바야 도심엔 자카르타 못지 않은 마천루가 늘어서 있지만 도심을 조금 벗어난 곳에 독특한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인근 주민들은 귀신이 나온다고 꺼리지만 그 건물이 품고 있는 문화적, 역사적 가치는 사뭇 뚜렷하다.

 

15일자 자카르타포스트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둥 세딴’(Gedung Setan), 귀신의 집이라 부르는 반유 우립 웨딴(Jl. Banyu Urip Wetan) 거리의 이 건물은 200년도 전인 1809년에 지어졌고 그런 별명이 붙을 만큼 복잡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 시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J.A. 판 미델코프(J.A. van Middelkoop) 주지사 사무실로 쓰이다가 19세기에 들어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뗑꾼관(Teng Khoen Gwan) 박사가 구매해 처음엔 그를 비롯한 화교들의 납골당으로 사용했다.

 

그둥 세딴이 납골당으로 쓰인 이유는 반유 우립(Banyu Urip), 기리라야(Girilaya)등에 있는 화교들의 묘지들과도 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후 200년 동안 이 건물에는 최소 63개 가정이 입주해 살았고 교회가 차려진 적도 있었다.

 

19659.30 공산당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촉발된 1965-1966년의 이른바 인도네시아 대학살기간에 군의 암묵적 지원을 받은 민병대가 전국적으로 화교들을 사냥하듯 학살했는데 이 건물은 난리를 피해 도망친 화교들의 은신처가 되어 주었다.

 

이후 2013년에 이르러 수라바야 시청이 이 그둥 세딴 건물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현재 수띡노 지얀또(Sutikno Djiyanto)라는 인도네시아 이름을 가진 66세의 중국계 후손 지 주안텍(Djie Djwan Tek)3대 째 이곳에 입주해 살면서 건물을 관리하고 있다


그는 8형제와 함께 이 건물에서 나서 자랐는데 그의 아버지 지 찌안 히안(Djie Tjian Hian)은 뗑꾼관 박사에게 직접 고용된 건물 관리인이었다. 수띡노는 2대 째 그둥 세딴을 관리하고 있다.

 

잃어버린 과거

이 건물이 귀신의 집이라 불리게 된 것은 주변 묘지들과 가까워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주민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960대까지도 이 건물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밤엔 귀신 같은 것이 어른거린다는 괴담이 나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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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대청은 한때 이 건물에 입주했던 교회의 다목적 공간으로 쓰였다.

 (사진=자카르타포스트/Yohana Belinda)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이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마디운(Madiun) 사태가 터졌다.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의 두 번째 휴전 기간 중이던 1948918일 인민민주전선(FDR)을 이끌던 무쏘 마노와르(Musso Manowar)가 소련에서 돌아오자마자 좌파 정당들과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무장세력을 규합해 공화국 지역인 동부자바 마디운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공산당은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정당한 재판 절차도 없이 공화국 군인들과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예기치 않은 공산 봉기를 맞아 도망친 중국계 후손들은 청화회(CHH)의 도움을 받아 그둥 세딴에 들어와 화를 피했다. 청화회는 식민지 시절 투표권을 통해 화교들의 권리를 찾으려 했던 친네덜란드 성향 보수 화교들의 정치조직이었다.

 

이후 화교들이 또 다시 그둥 세딴에 모여든 것은 1965년이었다. 공화국 육군 장성들 다수가 처참하게 살해된 9.30 쿠데타가 실패한 후 현지 화교들은 쿠데타 주축 세력으로 지목된 공산당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중국이 해당 쿠데타의 배후였고 모든 화교들은 공산당이라는 막무가내 논리로 인해 수많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이 피를 흘렸다. 그때에도 많은 화교들이 그둥 세딴으로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

 

관리인 수띡노는 아버지 이전에 다른 사람이 건물을 관리하던 시절 뗑꾼관의 많은 기록들이 소실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현재 뗑꾼관의 가족들 일부는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의 가족 무덤들도 수라바야에서 10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말랑으로 이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카르타 소재 역사가인 예리 위라완(Yerry Wirawan)은 똉꾼관이 당시 잘 알려진 유력한 인물이었지만 그에 대한 사료가 극히 부족한 이유가 독립운동과 독립전쟁 역사가 토착 현지인들의 영웅적 업적을 부각하는 데에 치우쳐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의 역사적 흔적이 상대적으로 희미해진 탓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더해, 대를 이어 오랫동안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화교들조차 이방인이라고 여기는 현지 주류 사회의 전반적 기조가 화교들의 역사를 잊히게 만든 측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는 유력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을 역사적으로 인정하는 추세도 엿보이기 시작했다. 새로이 부각되는 화교 인물들 중 마나도(Manado) 출신으로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인도네시아 해군 소장까지 지낸 자햐 다니엘 다르마(Jahja Daniel Dharma)란 이름의 존리(John Lie)가 대표적이다. 그는 현역 시절 싱가포르, 페낭, 뉴델리 등 아시아-태평양 권역의 여러 국가에서 근무했다.

 

다양성의 조화

비록 귀신의 집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둥 세딴에는 당연하게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화교들이고 일부는 그곳에서 산지 벌써 반세기가 넘었는데 입주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오이 리오에 니오(Oey Lioe Nio, 83)는 마디운 사태가 벌어지던 1948년에 그둥 세딴에 처음 들어왔다.

 

그곳에서 함께 살던 딸이 30킬로미터 떨어진 시도아르조(Sidoarjo) 지역으로 이사간 후 현재는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이 그녀의 노후를 돌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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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년 된 건물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관리인 수띡노(Sutikno) (사지=자카르타포스트/Yohana Belinda)  

 

마디운 사태 당시 화교 300여 명이 그둥 세딴으로 피신했지만 상황이 안정된 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고 현재는 자바인들과 마두라인들이 스며들어 함께 살고 있다.

 

종교도 처음엔 유교가 대세였지만 지금은 대부분 기독교나 이슬람으로 개종한 상태다. 그들은 별다른 갈등없이 조화를 이루며 그둥 세딴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금식월과 이둘피뜨리 축일 등 모든 종교의 기념일들이 이 건물에서 엄수되지만 역시 아직 화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탓에 음력설에 가장 성대한 행사가 열린다.

 

이 건물에서는 새로운 새대들도 태어나 자랐다. 33세의 림 헤니(Liem Henny)는 이 건물의 차세대 주민에 속하며 1층 입구 가까이에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궁극적으로 수라바야의 새 주택지에 나가 살게 되기를 꿈꾸지만 현재로서는 활기찬 분위기가 감도는 그둥 세딴에서의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지보수

하지만 그곳 커뮤니티의 활기찬 분위기도 건물의 노화를 막지 못했다. 수띡노는 지붕을 보수해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는데 건물이 사유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어 지자체 보조를 받지 못해 그 비용을 오롯이 자체적으로 감당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특히 우기에는 매트리스와 가구가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다.

 

주민들 중엔 자발적으로 건물 수리와 유지보수에 동참하는 이들도 있지만 또 다른 일부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서 도움을 주길 기대하기도 한다. 실제로 살라띠가 소재 기독교 계열의 사띠야 와짜나 대학(Satya Wacana University) 동문회가 얼마간의 기부금을 출연한 일도 있다.

 

그둥 세딴은 1948년과 1965년에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사실상 그와 비슷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수띡노는 비록 지금은 꽉 차 더 이상 새 입주자들을 받을 수 없지만 이 공간이 존재하는 한 이곳에서 모두 함께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건물 입주민들은 매달 15000루피아(1,260)의 월세를 낸다. 사실상 거의 공짜인 셈이다.

 

하지만 이 15,000루피아 월세의 용도는 분명하다. 8천 루피아(670)는 정부에 내는 건물세, 2천 루피아(170)는 상부상조를 위한 주민회비, 나머지 5천 루피아(420)는 전기세, 유지보수비로 쓰인다.

 

그러다가 주민들 중 상을 당하는 가정이 있으면 그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30만 루피아(25,000) 정도를 조의금으로 내놓기도 한다.[자카르타포스트/자카르타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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