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인도네시아 ISBN 신청할 때 더미북(Dummy Book) 제출 규정에 대한 논란 문화∙스포츠 편집부 2023-05-2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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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5월11일 드띡닷컴에 실린 밤방 트림(Bambang Trim) /교육문화부 도서출판센터 교과서평가위원의 칼럼입니다.
예전 ISBN 발급 관행으로 인해 영국 ISBN 본부로부터
경고를 받아 한동안 ISBN 발급이 중단되며 물의를 빚었던 인도네시아에서 이번엔 강화된 발급 규정의 불합리성으로
인해 ISBN 문제가 또 다시 대두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유일의 ISBN 관리기관인 인도네시아국립도서관(Perpusnas)에서 2023년 3월 30일, ISBN 발급을 신청하려면 반드시 워터마크가 찍히지 않은 도서 견본의 PDF
파일을 첨부해야 한다는 골자의 회람문을 돌렸기 때문이다.
해당 규정은 이미 시범적으로 운영되면서 이미 많은 출판사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는데 4월 1일부터 이를 지키지 않으면 ISBN을 발급해주지 않겠다고 국립도서관이
공식 선언한 것이다.
다른 국가 ISBN 관리기관의
예
국제 ISBN 본부가 있는 영국에서는 해당 ISBN 발급
업무가 민간기업에 위탁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 격인 대영도서관(British Library)은 ISSN만을 관리한다.
우선 용어정리를 하자면 ISSN은 국제표준연속간행물번호(International
Standard Serial Number)의 이니셜로 모든 종류의 신문, 저널, 잡지 및 정기 간행물과 모든 매체(인쇄 및 전자)를 식별하는 데 사용되는 8자리 코드를 말한다.
ISSN은
전 세계에서 간행되는 학술지, 신문, 잡지, 연감 등 연속간행물 자료의 식별을 위하여, 국제표준에 따라 고유번호를
부여하고 해당 간행물의 서지정보를 ISSN 국제센터에 등록하여 언어,
내용, 발행국가, 발행자에 관계없이 쉽게 식별하고
국제적으로 상호 활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다.
반면 ISBN은 국제표준도서번호(International
Standard Book Number)의 이니셜로 전세계에서 간행되는 각종 도서에 13자리
고유번호를 주어 특정할 수 있도록 하여 문헌정보와 서지유통 효율화를 기하는 제도다.
대영도서관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대영도서관은 ISBN 문제에 있어서는 관련 발급업무 지침을
세우는 것에 그치며 실제 발급업무는 닐슨 ISBN 에이전시(Nielsen
ISBN Agency)가 맡고 있다.
원래 출판 데이터 서비스와 도서시장 분석을
목적으로 1858년에 설립되어 오랜 도서정보관리 경험을 축적한 닐슨 북 데이터(Nielsen Book Data)가 현재 영국의 공식 ISBN 대행사로
등록되어 있다. 닐슨은 영리회사이므로 ISBN 발급과 관리
업무는 모두 유료다.
출판사들이 ISBN 신청을 하려면 우선 닐슨 영국
ISBN 에이전시의 회원으로 등록하여 세부 기업정보를 등재해야 한다. 그런 후 ISBN 발급신청을 하면서 해당 도서 정보를 첨부하면 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처럼 해당 도서의 견본 제본품이나 PDF 파일의 제출을 요구하진 않는다.
미국에서는 알알 보우커(RR Bowker LLC)가 민간 출판사들이 출간하는 도서들의 ISBN을 발급, 관리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알알 보우커는 1868년에 설립된 민간단체로 현재는 프로퀘스트(ProQuest LLC) 소속의 일개 사업부가 되어 있다. 닐슨 북데이터와
같이 알알보우커도 출판 데이터 서비스 및 도서시장분석 업무를 하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가 유-무료로 제공하는 정부간행물들은 미국정부출판국(Government Publishing Office - GPO)에서 관리한다.
대개의 경우 한 국가에 한 개 기관, 단체 또는 기업이
ISBN 발행을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이상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만약 한 국가에 두 개의 단체가 ISBN을 발행할 경우 한쪽은 일반출판물, 다른 한쪽은 정부출판물
같은 특별출판물의 ISBN을 발급하는 것으로 해당 업무범위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출판협회(IKAPI)가
ISBN 발급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담론이 있었지만 해당 업무를 기존의 국립도서관으로부터 이관해야 할 중대한 이유가 없었으므로 수용되지
않았다. 미국의 선례에 따라 IKAPI가 민간출판 부문의 ISBN 발급을 담당하고 국립도서관이 정부간행물의 ISBN을 맡는
방안 역시 같은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거 교육문화부에 여러 역할이 추가되면서 부처명이 바뀐 교육문화연구개발부 산하의 도서산업센터(Pusat
Perbukuan) 역시 ISBN 업무에 간여할 자격을 가진 곳이다. 도서산업센터는 도서출판시스템에 대한 2017년 기본법 3호와 2019년 정부령 75호에
기반해 설치된 법정 부서다. 도서산업센터가 ISBN 발급권한을
나누어 갖는 것 역시 가용한 옵션 중 하나지만 국립도서관은 해당 권한을 굳건히 홀로 독점하고 있다.
ISBN 발급권한의 분산 담론이 여러 경로로 나오고 있는 이유는 현재 ISBN 발급 시스템이
오히려 인도네시아 도서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도서산업 구성원들의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국립도서관이
독단으로 수립하고 강행한 ISBN 정책이 오히려 물의를 빚으며 도서산업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국립도서관, 도서산업센터, 출판협회가
장관급 또는 최소 1급 공무원 이상이 참석하는 고위급 포럼을 가지고 국립도서관의 ISBN 관리부서에 대한 인적자원 지원과 ISBN의 발급을 위한 신속한
검증 및 발행을 위한 기술지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업계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는 국립도서관의 ISBN 발급업무가 인적, 기술적으로 낙후되었음을 시사한다.
모호한 간행물들
정부 간행물들은 종종 그 성격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유료로 판매되어 세금외 국가수입(PNBP)로 잡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부처 도메인에 공개되거나 전자책으로 만들어져 무료로 접근, 조회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정부 간행물들에도 모두 ISBN 번호가 붙어 있다. 하지만
ISBN을 탑재한 정부 간행물들 중에는 실적보고서, 정책보고서 같이 책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대학들이 내놓는 논문류의 학술저작물과 연구보고서들은 물론 심지어 학생들의 대학생 봉사활동(KKN) 리포트까지
책으로 제본되어 ISBN이 신청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립도서관이 제본된 견본도서나 출판된 내용 전체를 담은 PDF 파일 제출을 요구한 것은
위에 언급한 것 같은 책 답지 않은 유사 도서들을 걸러내고 출판도서로서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출판물에만 ISBN을
발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그렇게 제출된 견본 제본품 도서나 PDF 파일의 내용을 어떻게
검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ISBN을 신청한 도서의 내용을 모두 읽어 확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많은
인원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도서들이 ISBN 발급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선 상황에서 출판사들은 자신이 요청한 ISBN의 발급을 기약도 없이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는 ISBN이 신청된 출판물을 어떤 기준으로
‘도서’라고 판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도서의
해부학적 지식을 가진 사서들이 검증원으로서 투입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좀 오래된 유네스코의 정의를 따르면 책이란 모름지기 정기간행물 같은 것이 아니어야 하고 표지가 두껍고 최소 49 페이지 이상이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국립도서관의 ISBN 검증원들도 최소한 이러한 기준을 밑바닥에 깔고 ISBN 발급에
합당한 도서인지 여부를 판단할 것이다.
한편 제출된 견본 제본품에 대해 해당 도서가 다른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은 오리지널 작품인지 어떻게 판정하냐 하는 것이다. 더미북(Dummy Book)을 제출하면 온라인에서 유사성 검증 어플리케이션을
돌리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된다.
더욱이 그것은 국립도서관의 업무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국립도서관이나 도서산업센터 모두 제출된
파일이 과연 양질의 도서인지 검증할 자료와 자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ISBN을 달고 나온 도서가 표절로 판명되면 원작자나 해당 출판사가 개별적으로 소송이나 이의를 제기해 손해배상을
요구하게 되며 ISBN 발급기관은 해당 문제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국립도서관이 견본 제본품을 요구하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책 답지 않은 책에 ISBN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국립도서관의 정책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없다. 하지만 해당 도서가 정말 책 다운 책인지 판명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당 도서의 목차와 맨 첫 챕터를 제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야 한다. 이를 조금 더 보완한다면 도서의
첫 챕터와 마지막 챕터의 PDF 파일 제출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서 내용의 품질과 표절 여부에 책임지지 않으면서 무작정 전체 내용이 포함된 책의 완성본을 견본 제본품으로 내놓으라는 것은 분명 지나친 요구다.
한편 PDF 파일에 워터마크를 찍는다고 해서 도서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워지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해당 파일을 제출하는 출판사가 해당 저작물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해당 파일을 아예 암호화하고 국립도서관의 ISBN 검증원에게만 관련
패스워드를 제공해 열어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방편이다.
이는 온라인 전자책 서점에서도 저작권보호를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방식이다. 출판자 또는
저작권자가 그들이 배포한 디지털 자료나 하드웨어의 사용을 제어하고 이를 의도한 용도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는 각종 기술의 통칭인 디지털권리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 즉 DRM을 사용하는
것은 출판사가 도서 PDF 파일을 국립도서관에 제출하는 출판사가 마지막 보루이자 최소한의 권리여야 한다.
중대한 문제
역사가이자 도서출판 대나무공동체(Penerbit Komunitas Bambu)의 이사이기도
한 J.J. 리잘(Rizal)은 견본 제본품의 PDF 파일을 워터마크 없이 제출하라는 ISBN 발급당국(국립도서관)의 요구가 심각한 권리침해라고 지적했다. 예전엔 ISBN을 신청할 때 도서 표지와 첫 챕터를 제출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PDF 파일 외에도 해당 도서가
오리지널 작품임을 증명하는 저자의 원본증명서도 의무적으로 첨부해야 한다.
책의 내용 전량을 담은 PDF 파일은 지적재산권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인데 ISBN 발급을 위해 이를 워터마크나 최소한의 보안장치도 없이 국립도서관에 제출하도록 하는 것은 민간기업에게는
매우 심각한 비즈니스 맥락의 문제가 된다. 자칫 금전적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서산업센터는 국립도서관이 PDF 파일 첨부를 요구하는 것이 온라인 평가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는 온라인 표절 검사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ISBN 발급신청을 위해 PDF 파일이나 견본 제본품 양쪽 중 하나만 제출하라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첨부하라는 것이므로 PDF 파일 제출은 필수다. 물론
PDF 파일의 경우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해상도를 낮게 세팅한 파일을 제출해도 되도록 허용되어 있다.
견본 제본품, 즉 더미북(Dummy Book)을
제출하는 것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더미’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가짜’, ‘복제품’ 정도의 의미를 갖지만 상업적으로는 본격적인 대량 생산에 앞서 만든 제품 모델 또는 시제품을 뜻한다. 기업으로서는 출시 전까지는 당연히 이를 비밀로 유지하여 보호해야 한다.
‘더미북’에 대해서는 1998년에 마틴 H 맨서(Martin H. Manser)가 '출판의뢰인이나 시장의 평가를 받을 목적으로 출판사가 실제 재질과 실제 크기로 제본해 규격과 제본 상태, 디자인 등을 물리적으로 구현해 보여주는 샘플’이라 정의했다. 말하자면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고 만든 구체적인 프로토타입인 셈이다. 국립도서관은 ISBN을 받으려면 이 프로토타입을 내놓으라는 규정을 만들어 내놓은 상태다.
더욱이 프로토타입 수준 전자책 더미 파일을 ISBN 발급을 위한 첨부자료로 제출하는 것은
저작권 보호차원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른 국가들의 ISBN 발급기관들은
해당 데이터의 유출이나 손상을 우려해 PDF 파일이나 더미북 제출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국립도서관은 ISBN 발급조건으로 당당히 이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해당 자료 유출로 저작권 침해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질 의도와 역량이 있음을 우선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회피 가능한 상황
이러한 문제에 대해 ISBN 발급을 위한 검증자료로서 책 전체가 아니라 책 내용의
일부만을 제출하는 것으로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저작권침해 피해와 해당 책임공방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PDF 파일의 경우에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낮은 해상도에 워터마크를 포함해 제출하는 것으로 문제를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다. 국립도서관 입장에서도 책의 그래픽 완성도를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전자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결코 문제될 리 없다.
사실 국립도서관 ISBN 발급부서가 책의 진위여부 판독을 위해 견본 제본품과 PDF 파일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볼 때 인도네시아가 책 답지 못한 책들을 마구 펴내는 출판사기꾼들의
나라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물론 표지와 목차, 첫 챕터를 요구할 경우 워드 프로그램과 칸바(Canva) 디자인 툴 같은 것으로 몇 분 내에 뚝딱 만들어 내고 출판사의 웹사이트, 인터넷 서점에서의 판매 활동 같은 것들 역시 어렵지 않게 조작해 내는
ISBN 브로커나 출판사기꾼들에게도 더미북, 즉 견본 제본품 도서를 제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국립도서관 입장에서는 해당 조건을 내세워 ISBN의 남용을 분명히 줄일 수 있다는 부분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ISBN 발급 규정을 새로이 한 이유가 책을 대량 출판해 유통할 계획이 없거나 아예
인쇄할 의도도 없으면서 무작정 ISBN을 요청한 신청자들에게 국립도서관이 ISBN을 무분별하게 대량 발급한 것에 대해 영국 ISBN 본부 측이
경고했기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국립도서관이 좀 더 분별력을 가지고 ISBN 업무에 임하라는 것이지 이를 빌미로
출판사들의 저작권을 위협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현재의 상황은 국립도서관이 과거 자신들의 업무태만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상황 탓, 환경 탓, 출판사 탓을 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드띡닷컴/기사 제공=배동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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