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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좁아진 세계, 그러나 멀어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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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0-12-31 17:36 조회 14,98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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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아진 세계, 그러나 멀어진 거리
 
배동선 /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지난 해를 맞던 심정과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인지, 그 시절의 세계가 지금과 같은 세계인지 싶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죠. 불과 1년이 지났을 뿐인데 말입니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나 싶지만 올해 더욱 그런 것은, 물론 전세계에 휘몰아치고 있는 코로나 광풍 때문입니다. 맨눈엔 보이지 않는 미세 바이러스가 세상에 드리우고 만 거대한 그림자는 그 손을 높이 들어 ‘역사는 이제 내가 오기 전과 온 후로 나뉠 것’이라고 선포하는 듯합니다.
 
실제로 문명권 안에 사는 사람들 그 누구도 코로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영향이 없을 것 같은 나 같은 전업작가조차 내가 스토리보드를 쓴 공포만화와 위인만화 총 10권 중 세 번째 책이 한없이 지연된 끝에지난 9월 간신히 그라메디아 서점에 깔렸지만 나머지 일곱 권은 출판이 무기한 연기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지난 3월 하순부터 3개월 가까이 오프라인 서점들이 폐쇄되면서 큰 타격을 입은 현지 출판업계가 분명한 매출이 보장되는 유명 작가의 책들에만 우선 순위를 두었기 때문이죠.
 
바이러스의 우격다짐에 등 떠밀려 들어선 뉴노멀 시대에 우리가 겪는 가장 분명한 변화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대변되는 공간개념입니다. 한 개인의 물리적 위치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거형태와 생활비, 비자 등 여러 사안들이 걸린 문제이니까요. 하지만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모두 한 곳에 모여 일해야 한다는 종래의 관념은 많은 업종에서 재택근무가 일반화되면서 해체되기 시작한 듯합니다. 물론 업종 특성상 그렇지 못한 사업장들도 수없이 많지만 재택근무는 ‘일’의 패러다임을 크게 바꾸었습니다.
 
채용부터 그렇습니다. 싱가포르에서 비자 기간 내에 전직에 실패한 아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카르타에서 들어온 지 2주 만에 싱가포르 회사에 취직되었습니다. 어차피 재택근무 상황에서 회사로서는 직원이 싱가포르에 있든 인도네시아에 있든 그 물리적 위치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물론 IT 업종이란 사실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후 각국이 국경을 걸어 잠그면서 아들은 8개월 동안 자카르타에 발이 묶였다가 지난 11월에야 싱가포르에 돌아갔지만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만 사무실에 출근하는 재택근무 상태는 여전히 계속되는 중입니다.
 
얼마 전 400여 장에 이르는 서류를 현지인 번역사 다섯 명과 한국인 번역사 세 명을 동원해 일주일 안에 번역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여덟 명 중 자카르타엔 달랑 두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발리 덴빠사르에 세 명을 포함해 족자, 땅그랑 ,찌까랑에 각각 흩어져 있었지만 평소라면 매우 부담스러웠을 그런 물리적 거리가 결과적으로 일의 결과물에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았습니다. 내 시야가 미치는 범위 안에 사람들을 두고 철저히 참견하며 관리하겠다는 마음을 버리면 그것을 대체할 여러 대안들이 떠오르는거죠.
그리고 비대면 근무방식은 결과적으로 예전에 직장 공간을 지배하던 외모나 인맥, 사내 정치 같은 요소들을 떠나 개인이 업무능력만으로 온전히 평가받게 되는 순기능도 엿보입니다.
 
아무리 등 떠밀어도 비대면의 세계로 갈 수 없는 분야들이 있습니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종업원들이 북적일 수밖에 없는 공장들과 사람들이 모여들어야만 돌아가는 여행, 숙박, 관광, 여가, 레저 산업에서는 선택하기 어려운 옵션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지탱해 주던 그 일터들이 마스크와 페이스쉴드로 무장하고서도 어디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바이러스에 마음 졸여야 하는 ‘위험한’ 장소로 변하거나 당분간 유지할 수 없어 황폐해지고 있는 것은 코로나 시대에 전세계가 국경을 초월해 똑같이 맞 고있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마침 지난 몇 년 간 구석구석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던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은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문 중 하나입니다. 상영관들은 다른 사업부문들에 비해 몇 개월 늦은 지난 10월부터 순차적으로 영업을 재개했지만 한국 좀비영화 <반도>나 12월 16일 전국 개봉한 <원더우먼1984>조차 ‘중앙 냉방이 가동되는 밀페공간’인 상영관 스튜디오에 미미한 숫자의 관객들을 불러들였을 뿐입니다.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코로나 공포의 총량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 예전 같으면 연일 블록버스터들이 스크린에 올랐을 성탄절과 연말연시 극장가에 신작 영화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그 와중에 개봉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던 로컬영화들 상당수가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로 대변되는 OTT 스트리밍 서비스로 직행하면서 신작영화 개봉의 메인 플랫폼이 상영관에서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모양새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던 영화관들이 텅텅 비고 핸드폰과 랩톱에서 신작 영화들을 즐기게 된 이 시대를 이제 막 시중에 나오기 시작한 코로나 백신들이 과연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새해에 대한 벅찬 희망이 넘쳐 흘러야 할 연말연시에 인도네시아 당국이 연이어 발표한 외국인 입국자에 대한 5일간 강제 자가격리와 외국인 입금금지 방침, 그리고 8천 명선을 위협하는 일일 코로나 신규확진자 수치는 우리들 대부분에게 분명 그리 순탄치 못할 2021년의 시작을 시사합니다. 현지 동포사회 깊숙이 침투한 코로나가 클러스터를 형성하며 창궐하고 있는 현실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친목과 단합을 위해 자주 모이고, 직접 찾아가 만나는 것이 예의였던 예전의 덕목들도 이젠 당분간 유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가 세계를 뒤덮고 영국에서 발생한 변종 바이러스가 당장 자카르타의 일상을 위협하면서 세계는 더욱 좁아지고 국경조차 바이러스에는 별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과 지인들 사이의 거리만은 그렇게 점점 멀어져 오직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만나야 하는 세계가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언제나 그랬듯 언젠가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회복되어 세상이 다시 활력을 되찾겠지만 당분간은 코로나가 몰고 온 ‘뉴노멀’시대의 새로운 덕목들과 보건 프로토콜 속에서 인내하는 수밖엔 없습니다.
 
“요즘 코로나 시대에 시민들이 연대하는 방법은 모두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언젠가 정은경 당시 질병관리본부장이 했던 이 말은 2021년 가장 공감되는,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에 버금가는 가장 서글픈 어록입니다. 흩어질 수 없는 업종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럴 테고요.
 
(사진=조현영/manzizak)
 
*이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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