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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193) 외할아버지의 선물-탈북학생 교육에 대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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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6,070회 작성일 2022-01-07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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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의 선물-탈북학생 교육에 대한 열정
 
조인정
 
그날은 가족들이 다 모여 있었다. 국가 공휴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인천에 사시던 외할아버지댁에 이모, 삼촌, 친척 언니, 오빠가 다 모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누구보다 일찍 저녁 식사를 끝내고 다섯 살 어린 여동생과 외할아버지 방에서 선생님 놀이를 했다. 어른들의 이야기는 어린 내게는 지루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댁에 오면 동생과 선생님 놀이를 하곤 했다.
 
문밖으로는 오랜만에 만나 기분 좋게 술잔을 건네는 어른들의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외할아버지께서 언성을 높이면서 이모부에게 말씀하셨다. 두 분이 싸우는 게 아닐까 걱정되어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조금 열고 그 사이로 거실 밖 상황을 살폈다. 처음으로 외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목격했다. 술기운에 감정이 복받치셨는지 외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이모부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죽으면 유골을 바다에 뿌려라. 북에 있는 가족에게 갈 수 있게.”
 
외할아버지를 보던 내 볼에서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가족 중 북한에 연고지를 둔 분이 있다는 건 그 날 처음 알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성장하셨다고 했다. 6.25전쟁 후, 삼팔선이 남북을 가로지르게 되어 북에 남아 있던 가족들과 생이별하셨다고도 했다. 조금은 엄격하시고 말수가 적으셨던 외할아버지의 모습만을 알고 있던 터라, 그 날 마주한 외할아버지의 눈물과 우연히 알게 된 안타까운 가족 이야기는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후 나는 엄마에게 외할아버지의 남동생이 6.25 전쟁 중 전사했다고 들었고, 전쟁 후 외할아버지께서 동대문시장에서 원단 장사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북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가족들을 찾기 위해 엄마와 이모들이 KBS 방송국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사연을 접수했지만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까지 듣게 되었다. 그것은 언제나 강해 보였던 외할아버지 뒤에 숨겨진 슬픈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자연스레 통일문제와 이산가족 이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통일을 주제로 한 글짓기 · 포스터 · 독후감 대회 등 공고가 나면 빠짐없이 참가했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가족이 북에 계실 거라 믿었고, 이러한 대회 참여가 외할아버지가 헤어진 가족들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외할아버지와 비슷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는 이산가족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분들을 위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이러한 통일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어린시절 외할아버지 함께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만난 재미교포 오빠
일본에서 대학 생활을 하면서, 나는 매 방학마다 인도네시아에서 그곳의 취약계층 아이들에게 교육 봉사활동을 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의 학문적 관심은 자연스레 ‘인도네시아의 도시 슬럼 및 농촌지역의 취약계층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발전했다. 어릴 적 누구보다 강렬했던 통일문제에 대한 나의 관심은 대학에서 교육학 전공 공부를 하며, 인도네시아 교육문제에 연구하며 사실 조금씩 잊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우연한 기회에, 그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나의 관심과 열정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2018년 가을, 석사과정 2학년 1학기 중 나는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한 학기 간 교환학생으로 교육학을 수강했다. 총 세 수업을 들었는데, 그중에는 개발도상국의 교육 정책 문제와 국제사회 개발 협력을 다루는 수업이 있었다.
 
그 수업의 기말과제는 ‘그룹별 교육 정책 브리핑’ 작성이었다. 각 그룹은 개발도상국 한 곳의 취약계층을 선택하여, 그들의 교육 불평등 실태 및 현 교육 정책의 문제점을 조사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 정책 방안을 제시해야 했다. 그 수업에서 나는 내 주변에 주로 앉던 친구들과 대화했기 때문에 학급의 모든 학생을 다 알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기말과제를 내 주신 그 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려는 내게 깔끔한 양복 차림의 한 아시아계 남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내 이름은 피터야. 한국인이라고 했지? 이번 과제로 탈북학생들에 대해 조사하려고 하는데 혹시 같이 기말과제 해보지 않을래?”
 
그때까지 나는 그 수업에서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었기에,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재미교포 2세가 나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더욱이 재미교포학생이 한국의 교육문제에 대해 연구를 함께해보자고 제안했다는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 동안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교육 문제가 아닌 다른 나라의 교육 문제 연구에 너무 몰두해 있던 건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피터 오빠의 제안은 내 마음 한 켠 잠시 그늘에 가려져 있던 통일문제에 다시금 조명을 비췄고, 나는 이 주제에 관해 오빠와 연구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말과제는 ‘개발도상국’의 취약계층에 대한 것이어야 했으므로 사실상 우리가 조사해보고자 한 ‘한국의 탈북학생’에 관한 이슈는 교수님께서 요구하신 바에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탈북학생들이 한국 사회의 취약계층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주제로 연구하는 것을 승낙해 주셨다.
 
우리는 그 날부터 영문 · 국문 저널과 정부 정책 리포트를 읽고 또 읽으며 탈북학생들의 교육문제에 대해 문헌 조사를 했다. 탈북학생들의 교육 기회 불균형과 학습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사회적 · 학문적 장애 요소들을 살폈고, 탈북학생들을 위한 현 국가 정책들을 찾아보았고, 그 정책들이 해결해 내지 못한 한계점들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 대안 몇 가지를 제시했다.
 
연구 내용이 예상보다 방대했으므로 이 과제를 마치기 위해 우리는 도서관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고,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시며 독한 카페인에 의존해 과제를 마쳤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 과제였다. 그러나 이 과제는 내가 그 때까지 했던 여느 과제들과는 달리 신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웠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주제에 관해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연구 내용을 미국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건 나를 두렵게 하기보다는 들뜨게 했던 것 같다. 나와 피터 오빠의 발표가 어쩌면 미국 친구들에게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국친구들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관심이 뒷받침될 때, 한국 사회를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탈북학생 교육권 보장을 위한 노력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발표 후, 교수님께서는 나와 피터오빠가 탈북학생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 접할 기회가 거의 없던 미국 친구들에게 이 이슈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에 고마움을 전했다.
 
나는 탈북학생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교육학자와 고민해보고 해결책을 찾고 싶어 이듬해 홍콩 교육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교육학자들 앞에서 이 이슈를 발표했고 함께 의논했다. 미국 · 남아공 등 세계의 학자들이 탈북학생 교육에 큰 관심을 보였고 내게 많은 질문을 해 주셨다. 너무 감사하게도 어느 교수님은 탈북학생들에 대한 나의 발표가 그 학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동료 교수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를 세계인과 공론화할 수 있었던 국제학회에서의 경험을 통해 탈북학생 교육에 대한 내 열정은 더욱 강해졌다. 더욱이 이러한 나의 연구가 조금이나마 탈북학생 교육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기를 바랐다.
 
학문적인 연구에서 실질적 탈북학생 교육지원 활동으로
2021년 팬데믹 장기화로 인해, 해외 박사과정 진학을 일 년 늦추게 된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 실질적으로 탈북학생들을 도울 방법을 모색했다.
 
인터넷 검색 중 ‘성공적인 통일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줄여서 성통만사, 혹은 영어로 PSCORE)’이라는 NGO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2012년 설립된 성통만사는 단체명에서 알 수 있듯 남북한의 성공적인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북한 주민과 탈북민들의 인권 강화, 탈북 초중고생 교육 지원, 국제사회에서의 통일 공론화에 힘쓰고 있는 비영리 · 비정부 단체였다.
 
특히 교육 분야에 있어서는 탈북학생들이 외국인 봉사활동 교사와 1:1 온라인 영어 튜터링을 받고, 미술 · 공예 및 플라워아트 수업을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며, 탈북학생들의 학업적 능력 향상 및 심리 정서적 안정감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성통만사의 현 교육 프로그램과 학습환경을 내 교육학 전공 지식과 경험을 살려 조금 더 발전시키고 싶었기에, 이곳의 ‘교육 인턴’에 지원하였다.
 
성통만사에서의 첫 근무 날, 오피스에 발을 들인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국 · 이탈리아 · 중국 · 독일 · 인도 등 여러 나라 각지에서 온 10명 남짓의 인턴들이 오피스에서 리서치를 하고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인을 찾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인턴 친구들이 현재 한국 국내 대학에서 학부 과정 혹은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통일문제와 탈북민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학교에서 이에 관해 공부한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또 다른 몇몇 인턴 친구들은 성통만사에서의 인턴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코로나 2주 격리를 하고 입국한 외국인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에게 “성통만사에서 인턴십을 하게 된 이유가 뭐야?”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 친구와 미국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제법을 전공하고 있는데, 탈북민들의 인권침해를 주제로 국제법을 연구하고 있어.”
“지금 한국 국제학교에서 중고등학생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들과 탈북민 인권 증진을 위한 동아리를 개설할 생각이야.”
 
그들은 한국인인 나보다도 더 탈북민들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깊은 관심을 오래도록 지녀오고 있었고 이를 실행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인과 재외동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피터오빠처럼 재미교포 친구들도 있었고, 페루 · 니카라과의 교포 친구들도 있었으며, 홍콩 · 독일 등지에서 유학하던 대학(원)생들도 있었다. 나도 최근에야 겨우 다시 탈북학생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점에 반성하고 있었지만, 외국 학생들보다 한국 대학(원)생들이 상대적으로 통일 및 탈북민에 대해 적은 관심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미안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탈북학생들을 위한 컴퓨터 활용 · 코딩교육
성통만사에서 내가 한 일 중 가장 보람찼던 일은 탈북학생들의 기본 컴퓨터 · 코딩교육 프로그램을 고안하고 시행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탈북학생 가정이 컴퓨터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고, 많은 탈북학생들이 그룹홈 (공동생활가정) 등에 살며 한두 대의 컴퓨터를 나눠 사용하여야 했기에 학생들은 충분한 컴퓨터 사용 · 학습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디지털 불평등의 현실은 탈북학생들의 매우 낮은 디지털 리터러시 (디지털 문해력) 수준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많은 탈북학생은 공통적으로 컴퓨터 문서작성을 어려워했고, 한컴타자 또한 100타를 넘기지 못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디지털 언어와 장비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하여 흔히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디지털 원어민)’로 불리는 현 Z세대 (1997~2012년 출생)의 초등 고학년 · 중학생들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인해 탈북학생들이 유일하게 컴퓨터 사용을 배우던 학교의 컴퓨터 시간마저 그들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향상하는데 큰 제약이 있었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학교의 컴퓨터 수업 중 담임선생님은 학급의 모든 아이의 이해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수업내용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탈북학생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도움을 주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탈북학생들을 위한 컴퓨터 교육 어떠세요?”하고 탈북학생들을 관리하는 탈북민 ‘통일전담교육사’ 선생님들에게 그 프로그램을 제안했을 때 선생님들은 환대해 주셨다.
 
탈북학생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선생님들께서 남한 학생들과 비교하면 현저히 미흡한 탈북학생들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걱정해오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나와 한국인 교육 인턴 두 명은 곧바로 탈북학생들이 워드 · 파워포인트 · 스크래치(Scratch) 코딩을 배울 수 있는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 커리큘럼을 계획했고 고안했다. 너무도 다행히 탈북학생 교육지원에 대한 우리의 뜻을 함께하며, 기본 컴퓨터 · 코딩 수업을 진행해 줄 숙명여대 IT 공학학과 학생들을 알게 되어 우리의 프로그램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학생들이 온라인 교육에 사용할 컴퓨터, 헤드셋, 웹캠 등의 기본 교육장비가 너무 열악했고, 이를 제대로 보완할 수 있는 충분한 예산이 성통만사에게도 통일전담교육사에게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와 한국인 인턴들은 컴퓨터 · 코딩 교육 커리큘럼을 구성하며 동시에 몇 주에 걸쳐 프로그램 제안서를 작성해 기업과 모금회 단체 등에 제출했지만, 번번이 거절의 고배를 마셨다. 결국 탈북학생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생각하시는 ‘통일전담교육사’ 선생님들께서는 직접 자신의 자비를 들여 헤드셋, 웹캠 등을 구입했다.
 
탈북학생들이 디지털 시대에 뒤처지지 않을 핵심 역량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 우리의 프로그램은 그렇게 최소 수준의 열악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학생의 키보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또 어느 학생의 모니터 화면은 빨갛게 나와 원만한 수업을 하기는 쉽지 않은 환경인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열악한 환경도 탈북학생들, 숙명여대 봉사자 선생님들, 통일전담교육사 선생님의 배움과 가르침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수업은 계속 진행되었고, 일주일 한 번 있는 컴퓨터 · 코딩 수업 시간을 학수고대하는 탈북학생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의 컴퓨터 교육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 탈북학생들에게 온라인으로 진행한 스크래치(Scratch) 코딩 교육
 
외할아버지의 선물이 만든
외할아버지는 통일을 보지 못하시고 2015년 하늘로 떠나셨다. 아직도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 외할아버지의 그 날의 말씀은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남북한 용어 비교 숙제를 받아 외할아버지께 전화해 북한어 뜻을 물어보던 기억, 남북한어를 모두 다 사용하실 줄 아는 외할아버지를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한 기억, 그리고 북한에서 즐겨 먹는 만두를 좋아하시는 외할아버지를 위해 명절이면 만두를 빚은 즐거운 기억도 있다.
 
한편, 외할아버지의 친척과 가족이 우리나라에는 한 분도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들었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훔친 슬픈 기억도 있다. 외할아버지는 살아생전 내게 한 번도 자신의 가족사를 직접 꺼낸 적은 없으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강인해야 함을 알고, 한국전쟁과 분단의 역사와 아픔을 가슴 속 저 깊은 곳 손이 닿지 못할 곳까지 밀고 또 밀어 두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의 눈물과 내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은 이미 외할아버지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한 가지 확실했던 건 외할아버지의 아픔에 공감했기에 나는 남북통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으로 탈북학생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까지도 고안하게 되었다.
 
남북통일 · 탈북학생 교육에 대한 나의 열정은 모두 외할아버지가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가 식지 않는 열정을 바칠 수 있는 ‘탈북학생 교육’이라는 주제로 나를 이끈 건 모두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이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분명 모르셨을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손녀로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것을 내가 얻었는지, 행복한지 말이다. 할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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