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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166) 미술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사탕에서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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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6,473회 작성일 2020-12-0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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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사탕에서 시작되다:
역사 흐름에 따른 일본 동성애 인식의 변화
 
조인정
 
 
2012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쿠바 출신 미술 작가인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 Torres) 전시 회를 찾았다. 전시관 한 귀퉁이 바닥에는 알록달록한 셀로판지 포장의 사탕들로 쌓여져 있었는데 관객들은 사탕을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었다. 나도 예쁜 사탕을 맛볼 수 있다는 기쁜 마음에 그 사탕을 하나 집어 들었다. 하지만 곧, 그 사탕더미가 총 79kg이며 이는 작가의 동성 연인인 로스 레이콕(Ross Laycock)이 에이즈로 생을 마감하기 전의 체중을 의미함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그 사탕을 입에 넣을 수 없었다.
 
사탕이 로스의 육체를 상징한다면, 관객들과 내가 무심코 입에 넣은 사탕이란 곧 레이콕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끝내 그 사탕을 먹지 못했다. 그로써 로스의 소멸 혹은 죽음을 늦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 다음날 전시담당자는 줄어든 사탕의 양을 다시 채운다고 한다.) 레이콕의 죽음으로 5년 후에 같은 병으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또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연인을 먼저 떠나보낸 그리움과 애달픔, 그리고 현생에서 그 둘의 짧았던 사랑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처럼 내 가슴을 애잔하게 적셨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Felix Gonzalez Torres,
<무제-LA에서의 로스의 초상화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1991
(출처: The Felix Gonzalez-Torres Foundation, 1991)
 
그 강렬한 작품의 영향에서 였을까? 나는 그 후 일본 대학교 재학 중에 젠더학을 수강했다. 내가 젠더학을 수강하던 당시 2015년 일본에서는 동성애에 관한 기념비적인 일이 있었다. 그 해 초 3월에 도쿄도 시부야구 의회에서 일본에서는 전례 없던 ‘동성 커플 인증 조례안’을 통과했던 것이다. 이로써 동성커플은 결혼에 상당하는 관계를 인정하는 인증서를 발급받게 되고, 아파트 임대 및 병문안 등 가족 관계에서만 인정되었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LGBTQ의 인권과 동성애 이슈에 대해 보수적인 일본에 성소수자 권리 증진의 혁명적 물결을 일으켰다. 하지만 젠더학을 통해 나는 일본의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시선이 처음부터 보수적이지 않았고, 역사의 흐름에서 변천되어 왔음을 깨달았다.
 
일본역사에서 ‘동성애’는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일본에서 ‘색’을 나타내는 한자 色(iro)는 현재까지도 ‘성적욕망’과 연관되는데, 과거 에도 에도시대(1603-1868)에는 남성이 성적욕망을 두 가지 색으로 구별하여 말했다. 하나는 ‘남성을 향한 욕망’을 가리키는 ‘남색(男色, nanshoku)’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을 향한 욕망’을 의미하는 ‘여색(女色, joshoku)’이었다.
 
남성들의 공간인 불교 수도원에서의 가르침은 승려들에게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남색과 여색을 일깨웠다. 전설에 따르면 진언종(真言宗)을 설립한 승려 구카이(空海)는, 9세기 초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승려들에게 남색(男色)을 ‘중국의 관습’으로 알리고 전파했다. 중국문화를 우러러보던 일본의 수도원에서는 중국의 수도원에서 실제로 행해지던 그 관습을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의 형태’로 받아들여 행하기 시작했다. 남색관계에서 연륜이 많은 불교 승려 ‘낸자(念者)’는 12-18세 사춘기 나이의 어린 소년인 ‘치고(稚児、 ちご: 스님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수행자)’와 육체적 사랑을 나눴고 이러한 육체적 관계는 치고가 성인이 될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치고가 어른이 되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깊고 끈끈한 ‘정신적 유대관계’로 발전되었다. 반면, 그들에게 있어 여성을 향한 성적욕망을 뜻하는 여색(女色)은 미성숙하고 경솔한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남색문화는 사무라이계층이 실권을 장악하고 군사봉건국가의 형태를 갖춘 12세기 말, 사무라이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계승되어 일본사회에 더욱 깊게 스며들었다. 사무라이 사이에서 남색이 전파될 수 있었던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교를 숭상하던 사무라이들은 어릴 적부터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는데, 남색의 근원이었던 그 곳에서 어린 소년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수발하던 스님과 남색을 경험하며, 동성애를 이상적인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몸으로 익혔던 것이다.
 
1603년 에도시대가 막을 열기 전까지 계속된 장기간의 전쟁은 사무라이들이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남성들만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했다. 에도시대(1603~1868)의 국가적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에도 사무라이들은 반란을 막기 위해 집을 떠나 도성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여성과의 만남은 여전히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사무라이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남색문화인 ‘와카슈도(若衆道)’를 생성시켰고 남성간의 사랑을 나누었다. 와카슈도는 글자 그대로 ‘어린 소년의 길’을 일컫는데, 불교 수도원에서의 낸자와 치고의 관계와 동일하게 연륜이 있는 사무라이와 그에게서 무술과 생활양식의 교육을 받던 어린 사무라이는 ‘의형제 관계’에 의의를 둔 육체적인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와카슈도는 빠르게 끓고 식어버리는 한순간의 육체적 로맨스가 아니었다. 두 사무라이는 육체적인 관계보다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관계를 중시했고, 이는 둘의 끈끈한 의형제를 일컫는 동시에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헌신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두 사무라이는 서로에게 육체적, 정신적 지주가 되어 전쟁 중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서로를 지켜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국시대 ‘3영걸(三英傑)’로 불리며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다이묘(大名: 많은 영지와 권력을 가졌던 봉건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富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独川家康) 또한 그들과 와카슈도의 관계를 나눈 어린 사무라이가 있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여러 역사 문헌들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더욱이, 다이묘에게 있어 아내와의 혼인은 자손번영을 위함이 우선이었고, 그들의 남성 애인들은 그들과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교감을 나누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아내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로 여겨졌다. 남색이 상징하는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을 추구한 다이묘는 지방 출장 중 료칸에 들러 머무를 때에도 어린 남성들을 성 상대로 부르기도 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2005)
 
18세기에 접어들어 수도원과 사무라이 사이에서 성행했던 남색은 교토와 오사카 등지의 대도시 내에서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쇼군의 명령에 따라 막대한 수의 사무라이들은 도성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그 주변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성장하는 도시의 사회기반 시설 축조를 위해 곧 수많은 일반 백성들이 투입되었고 도시 인구는 순식간에 급증하였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사무라이들의 와카슈도는 이상적 로맨스의 형태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무인 계급의 꽃’이라 불려 졌고, 남색은 상류층들의 사랑 혹은 여가의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곧 일반 백성들은 남색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특히 시장경제 발전으로 부를 축척하게 된 중산층들은 성매매된 남성 사이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 상류층의 순수한 사랑을 즐겼다. 상업적 성매매는 1650-1750년 사이 최고점을 찍었는데, 성매매 종사자의 수는 남녀를 불구하고 상당했고 성매매는 매춘가 뿐 아니라 가부키 극장에 이르기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당시 남성 가부키 배우들은 극장무대에서는 공연을, 공연을 마치면 다른 남성을 상대로 성접대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순수함과 고귀함의 상징이었던 남색은 사치와 성적방종의 그늘에 퇴색되어 갔다.
 
쇄국 정책을 펼쳤던 에도막부가 몰락하고 도래한 메이지 시대(1868~1912)에서 남색은 문화적 격변기를 맞이한다. 중앙집권적 국가를 수립한 메이지 정부는 개방경제를 펼쳐 해외문물을 수용하고 외국과 통상외교를 이루었는데, 이 때 서양인들과 그들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기독교적 관점을 가지고 일본의 동성애를 바라본 서양인들은, 남색이란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 사악하며 인간의 자연적 혹은 생리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서양에 대항할 만만 국력 증진이라는 야심을 품고 있던 메이지 정부에게 서구의 비난은 국가적 수치였고 망신이었다. 권력향상을 위해 메이지 정부는 결국 서양문화를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한 때 사회주류를 이루던 남색문화는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다. 뿐만 아니라 에도시대에는 남색이 정신적 유대감과 결속력 강화를 이끌어 국가의 강력한 봉건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적 역할을 했지만, 봉건질서가 붕괴된 메이지 시대에는 정부가 남색 문화를 지속시켜야 할 실질적 이유가 없었다.
 
그 후 다이쇼 시대(1912~1926)에는 처벌을 가하기까지 하며 억압되었던 남색 그리고 동성애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에 대해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의 일본 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현대에는 각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만화 등의 대중매체가 동성애가 ‘헨타이(変態)’ 즉, ‘변태성욕’ 이거나 ‘단지 허구세계에서 존재하는 판타지’라는 잘못된 편견을 대중들에게 불어넣어 일본사회의 왜곡되고 편협적인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부추기고 있다. 이토록 일본 사회가 소외시키고, 부정하고, 각색한 동성애는 결국 ‘동성애=비정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쓰라린 차별대우를 겪고 그들의 존재는 외관적으로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회의 그늘로 내몰리고 있다. 물론, 이에 반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는데, 1994년부터 매년 열리는 퀴어(Queer)문화 축제인 도쿄 레인보우 퍼레이드에서는 무지갯빛 코스프레와 페이스페인팅으로 치장한 성소수자들과 일반 시민들이 함께 동성애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혁적 조례, 동등한 권리 보장 등을 주장하며 성소수자라는 사회적 편견을 해방하고 자유로운 사랑이 포용되는 미래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한 미술작품, 사탕더미.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매료되어 집었던 사탕 하나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에 대한 깨달음은 나를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찰로 이끌었다. 학부시절 젠더학을 수강하고, 대학원에서 인도네시아의 통합적 섹슈얼리티 교육(comprehensive sexuality education)에 대해 연구를 했던 내 모습을 돌이켜 보면, 고등학생 때 마주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와 연인 로스 레이콕의 애달픈 사랑이야기는 내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고 내가 한 사회의 동성애를 배우게 되는 계기였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작가의 사랑이야기가 나를 ‘사랑과 섹슈얼리티’라는 주제 그리고 ‘사회담론’이라는 이슈에 대해 탐구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에 큰 감사함을 느낀다. 또한 일본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서양의 의식에 토대를 둔 사회담론에 의해 격변되었고 현재는 동성애자들을 ‘성소수자’라는 카테고리로 정의해 사회의 구석으로 밀어내고 있는 데에 안타까움과 동정을 느끼며, 일본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의식 신장이 있기를 희망하고 그들의 인권 증진을 향한 노력을 지지한다.
 
한 때 일본인들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 형태의 사랑’으로 여겨지던 동성애를 다시금 이해하고 포용할 때, 궂은비가 끝나고 떠오르는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동성 연인의 사랑도 사회의 편견을 해소하고 아름답게 파란 상공을 빛낼 거라는 부푼 기대를 가져본다.
 
 
*이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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