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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197) 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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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5,241회 작성일 2022-03-10 18:51

본문

독작
 
시. 채인숙
 
 
판다누스 나무 아래 누워 북국에서 온 차가운 술을 마신다
 
말루꾸에서 건너 온 바다 냄새가
후르륵 술잔에 내려앉는다
 
어제는 판단 잎을 오래 삶았다
 
무른 잎을 잘라 찹쌀밥 몇 개 뭉쳐 매듭을 묶고
남은 물로 머리를 감았다
 
오후 다섯 시면 서둘러 해가 지는
우기의 날들

나는 어쩌다 여기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당신의 부랑은 어디서 끝이 나는 걸까
 
얼굴 가득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에밀리 브론테의 시를 읽는다
 
너 홀로 남겨져도
모든 존재는 네 안에 존재하리*
 
결정적 고백을
결정적 순간마다 놓치는 것은
그토록 격정 없는 내 생의 비밀이었지만
 
언제쯤이면
당신과 나의 아득한 시차는
한 잔 술에 뒤섞여 사라지고 말 것인지
 
*에밀리 브론테의 시에서 인용
 
(사진=조현영)
 
 
< 시작노트 >
자카르타에서 하멩꾸부워노 왕조가 21세기를 다스리는 공화국 속 특별자치구로 이사를 온 지 2년이 되어 간다. 이곳에서는 홀로 술을 마시거나 하루종일 한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꽤 많다. 덕분에 오롯한 나를 만나 고립과 고독의 차이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대도시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수많은 사물들과 자연이 새롭게 인식된다. 그 시간들이 축적되어 내적 필연성을 가진 시로 내게 와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저 어디에 있어도 읽고 쓰는 일이 일상 안에 반복되고 있다는 것만이 큰 위로가 된다. <독작>은 그 어느 하루를 시로 기록한 것이다.
 
 
*채인숙/시인
-2015년 <실천문학> 제4회 오장환신인문학상 등단.
-2021년 <라라종그랑> 한·인니 5인 시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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