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179) 여름 가고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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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가고 여름
채인숙
시체꽃이 피었다는 소식은 북쪽 섬에서 온다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뿌리며
가장 화려한 생의 한때를 피워내는
꽃의 운명을 생각한다
어제는 이웃집 마당에서 어른 키 만한 도마뱀이 발견되었다
근처 라구난 동물원에서 탈출했을 거라고
동네 수의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밀림을 헤쳐 만든 도시에는
식은 국수 면발 같은 빗줄기가 끈적하게 덮쳤다
밤에는 커다란 시체꽃이 입을 벌리고
도마뱀의 머리통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목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지만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
납작하게 익어가는 열매를 따먹으며
우리는 이 도시에서 함께 늙어갈 것이다
꽃은 제 심장을 어디에 감추어 두고 지려나
여름 가고 여름 온다
(시와 경계 2021 봄호 – ‘오늘의 주목할 시인’ 특집 발표작)
시작노트:
지난 3월, 한국에서 한,인니5인 공동시집 <라라종그랑>을 출간했다. 2년여 긴 시간 동안 3명의 인도네시아 시인들과 2명의 한국 시인이 함께 시를 쓰고 번역해서 50편의 시가 두 나라의 언어로 나란히 실리고, 한 편의 시마다 인도네시아 사진(조현영 작)이 함께 실린 시집이 나온 것이다. 고맙게도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에서 CGV 영화관을 빌려 성대한 시낭독회를 열어주었고, 100권의 시집을 한국에서 직접 구매해 시를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관객들에게 드리는 싸인회를 기획해 주셨다.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계간 ‘시와경계’ 봄호에 ‘오늘의 주목할 시인’으로 뽑혀 6편의 신작시와 10페이지에 달하는 비평이 함께 실렸다.
노력한 이상의 대가와 선물이 내게로 온 봄이었다. 그런데 마음 한 켠이 내내 무너져 있었다. <라라종그랑> 시집을 함께 낸 김길녀 시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열흘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자카르타로 가서 시낭독회를 하자고 약속한지 불과 2주가 지난 뒤였다. 부군은 그저 시인의 뜻이 그랬다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주목나무 아래 묻어달라 하였다고, 채시인을 너무 좋아했고 늘 고마웠다고 꼭 전해달라 하였다고, 담담히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지난 봄, 나는 무슨 예감처럼 이 시를 썼던 것이지... 원망과 후회가 뒤섞인 채, 가까운 이들의 연이은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잔인한 계절이 지나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우리에게 주어진 계절을 변함없이 살아내리라. 여름이 가도 또 여름이 오는 이곳에서...
(사진=조현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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