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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138) 피아노 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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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8,130회 작성일 2020-05-0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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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남자
 
홍윤경 / Pleats kora Indonesia 대표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펜더믹 코로나19라는 생소하고 낯선 상황으로 조금 망설여지는 그런 날이었다. 그를 만나기로 한 곳이 땅그랑 서르뽕 지역의 빈민가였기에 감염 걱정이 영 없지는 않은, 그래서인지 마음이 평온하지는 않는 불안한 길이었는데 그 남자는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약속 장소에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가 안내하는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의 삶만큼이나 구불구불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좁고 어두웠다. 그는 YPKP65 (1965대학살연구소)의 대표이자 인도네시아의 인권활동가이신 베조 운뚱 씨(Bapak Bedjo Untung).
 
인권운동가 베조 운뚱 씨 (사진=고찬유 기자 2020.3.24)
 
오늘 그와의 만남은 그가 2020년 40주년 518광주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직접 축하도 하고,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주선하기 위함이었다. 인도네시아의 현대사 가운데 1965~1966년은 9월 공산당의 쿠데타를 진압하며 권력을 쟁취한 수하르토를 주축으로 하는 군부로부터 무고한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반공 대학살을 당한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이 참담한 역사를 미국중앙정보국은 “20세기에 벌어진 가장 처참한 집단학살”이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그 시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남자 베조 운뚱.
 
남자의 나이 겨우 17살, 그는 가장 어린 나이의 수감자가 되어 모진 고문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녔던 짧은 기간과, 이 감옥 저 감옥 옮겨 다니며 치러 내어야 했던 기아와 전기고문, 그리고 7년간의 처참하기만 했던 강제노역이 남자의 성성한 눈 속에 그대로 담겨 있는 듯 했다. 남자의 시련은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끝나지 않고 질기게 그의 삶을 따라다녔다. 정치범이라는 낙인과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는 감시를 자유 아닌 자유로 여기며 살아온 그 기막힌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더해진 그는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다.
 
수용소에서 풀려 난 후 그는 한 여인 엔당(Endang)을 만난다. 그 음산했던 시절 7살 어린 소녀의 눈은 아버지의 잘린 목이 걸려있는 것을 보아야 했고, 아직도 그 때의 이야기를 본인의 목소리로 직접 누군가에 말하지 못한다 했다. 그녀는 그저 인권활동을 하는 남자를 옆에서 말없이 그 세월에 대해 저항을 하듯 남자를 지켜내는 것으로 조용히 저항하는 듯 했다. 성성한 그의 흰 머리카락과 아직도 날카롭게 살아있는 눈빛이 그 남자의 비범하지 않은 인생을 말해주는 듯할 뿐, 남자와 여자는 그저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지는 따듯하고 착한 오늘을 살아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남자와 여자의 오늘은 켜켜이 쌓인 먼지와, 낡고 허물어져가는 그래서 시급한 수리와 보수가 필요해 보이는 작고 좁은 집이 전부일거라 생각했는데, 그 집 안에는 그 집 상황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아주 낡고 오래된 그러나 정성스레 닦고 관리한 먼지 앉지 않은 피아노 한 대가 남자와 여자의 지난한 삶을 여전히 연주하는 듯 집 가장 좋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베조 운뚱 씨와 부인 엔당 씨 (사진=고찬유 기자 2020.3.24)
 
그 남자의 인생 여정을 듣는 3시간의 시간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아무렇지 않게 너무도 담담히 그가 그려내는 지난날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나에겐 상상조차 되지 않는 그런 삶이었기에 차마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도, 공감한다는 끄덕임도 표현할 수도 없었다. 아직은 부모 옆에서 보호를 받고, 친구들과 어울려야 할 그 파란 나이에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지지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 그 역시도 지지했던 수카르노라는 한 사람 때문에 그의 인생은 채 피기도 전에 부러지고 말았다.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의 단절만으로도 힘겨웠을 그에게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자카르타에서의 생활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그의 나이 겨우 16살 고등학생이었는데……
 
독재정권의 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닌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신분을 숨기고 백화점 점원이 되어 일을 하던 때, 함께 일하던 동료의 밀고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수배자의 삶보다 더한 나락의 길로 떨어져야 했다. 여러 감옥으로 옮겨지는 불안감과 모진 고문은 차라리 견딜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배고픈 것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는 17살의 소년…… 이 감옥, 저 감옥으로 이송되어지다 지금의 땅그랑 서르뽕 지역에 위치한 감옥으로 이송되면서 소년은 강제노역장으로 새벽부터 끌려 나가야만 했다. 그곳에서도 고문보다 더 지독했다는 배고픔은 소년으로 하여금 쥐, 뱀, 도마뱀, 곤충 등을 잡아먹으면서 살아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다 했다.
 
베조 운뚱씨가 7년 간 수용됐던 감옥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사진=고찬유 기자 2020.3.24)
 
그렇게 흘러간 7년의 세월. 그 열악하고 암울한 그 시간에서도 소년은 꿈을 꾸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넘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리고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혔다 했다. 비록 종이 건반에 연주하는 선율이었지만 그의 귀에는 그 아름다운 선율이 생생히 들려오는 듯 했다고, 아련히 말하는 그의 표정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를 그 지옥에서 견디게 한 것이 그를 살게 했다.
 
국제적십자 등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감옥으로부터 석방이 되었고, 그 곳에서 독학으로 익힌 영어와 피아노 덕분에 그는 새로운 삶으로 나왔다 했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쉬지 않고 수용소 안에서도 그렇게 강제노역을 했는데 이렇게 밖에서 돈도 벌면서 일하는 것이 너무도 좋아서 일을 찾아서 했다고 했다. 그리고 외로워서 더 열심히 일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고향의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다. 정치범이라는 꼬리표가 그렇지 않아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가족들에게 짐이 될 까봐 소년에서 청년이 된 그는 고스란히 그 외로움을 일하면서 견디어 냈다. 죽어라 일한 만큼의 보상이 주어졌을 때 그가 처음 한 일을 진짜 피아노를 사는 거였다. 생의 첫 피아노를 사고 혼자서 또 죽으라 독학으로 연습하고 다음날이면 피아노 레슨으로 그는 살아냈고, 지금의 집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했다. 그 피아노가 긴 세월 그와 함께 세월을 살아내며 집안 가장 좋은 자리에서 반짝반짝 그와 함께 나이 들고 익어가고 그랬나 보다.
 
그 집을 구입하고 그는 1999년 함께 투옥했던 정치범 동료인 프라무디야 아난타투르를 비롯한 7명의 동료와 지금의 연구소를 그 집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다들 가난했다. 십시일반 돈이 조금 모이면 실종자와 희생자를 찾는 일을 하고, 돈이 벌리지 않으면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된 엔당의 교사월급으로 생활을 하고, 그는 희생자와 실종자를 찾아 인도네시아 전역을 돌아다녔다. 감시와 미행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도 그는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실종자와 희생자를 찾아다니고, 누구도 들어주지 않은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조금씩 더디지만 한 걸음 한걸음 그와 그의 동료들의 활동으로 그들은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국제사회를 움직였고, 그들의 활동은 세계 각국의 인권단체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 했다. 우리가 잘못 하지 않은 것을 알아주고,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다시는 이런 부당한 일들이 후대에는 일어나지 않는 거라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아직 진행 중이다. 수감자 중 가장 어렸는데 이제는 이렇게 늙어버렸다는 자조적인 그의 음성이 아프다. 반세기 훌쩍 넘게 진상 규명이나 공식적인 사과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그저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미안하다는 한 마디가 듣고 싶은 것인데……살아있는 동안 들을 수 있을까? 하시며 긴 인터뷰를 끝내셨다.
 
베조 운뚱씨를 찾은 한인들과 (사진=홍윤경 2020.3.24)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이 나고, 그는 지금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가 7년간이나 강제 노역한 장소로 함께 가주기를 원했다. 속으로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조금 난감했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그의 인생과 세월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의 살아온 인생에 대한 예의로 그와 함께 그 자리에 서있기는 해야 할 것 같은 무거운 마음에 그를 따라 나섰다. 72세의 노인이라고는 느낄 수 없게 상기된 그는 그때 여기는 어디였고, 이곳에서 어떻게 노역을 했는지에 대하여 너무도 생생하게 알려주셨다. 이미 그곳은 현대화가 진행되어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각종 관공서가 즐비하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겨 생활하는 쇼핑센터까지 들어서 있었다. 그는 그 쇼핑센터를 바라보며 너무도 아파했다. 저기에…… 저 자리에……기념비라도 하나 세워지길 바랐는데, 이곳에 우리가 왜 있었는지 알려주는 기념비 하나 만이라도……초로의 그 남자는 그 성성한 눈빛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붐비는 쇼핑센터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할아버지하고 불렀다. 그리고 가지고 온 마스크 5장을 나눔 하며 조만간 다시 만나기를 약속했다.
 
할아버지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 참으로 길었다. 할아버지가 피아노를 열고 연주해 주시던 선율이 귓가를 따라온다. 피아노는 언제 조율했는지 그 소리가 둔탁했다. 둔탁하고 삐걱이던 그 소리가 마치 세상은 아직도 정의롭지 않은 듯 절망스럽기도 했고, 어둠은 빛을 이긴다 했지만 그 어둠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 절망스럽기도 했다. 한국의 80년대의 4·19혁명과 518 광주민중항쟁, 2016년의 세월호 침몰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돌아보게 되는 길이었다. 헤어지면서 할아버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 것 같아요? 라는 나의 물음에 그 남자는 다시 돌아가도 나는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거다. 라고 하셨다.
 
그 한마디가 오래 귓가를 돌아다닌다.
 

*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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