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154) 외로울 때 나는 해양 박물관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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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울 때 나는 해양 박물관에 간다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알고 싶던 것도 많았던 시절, 외로울 때 나는 바다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순다 끌라빠 지역에 있는 해양 박물관(Museum Bahari)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바다 향기에 흠뻑 취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해양박물관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유럽 시장에서 인기가 많았던 육두구와 후추같은 향신료, 바틱같은 직물, 커피, 차, 구리, 주석, 인디고 염료 등을 보관하고 포장하는 창고였다. 이 상품들은 가까이 있는 순다 끌라빠 항구를 통해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항구로 나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1652년부터 건축하기 시작하여 여러 해가 걸려서 완공했다. 건물 가까이 바다가 있어서 염분으로 건물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식에 강한 주석과 동을 건축 재료로 많이 사용하였다. 1718년, 1719년, 1771년에 세 차례에 걸쳐서 보수했다고 박물관 입구에 적혀 있다. 박물관의 몇 개의 출입구 문 위의 돌에 창고 수리, 확장 또는 추가가 된 연도가 적혀 있다. 건물을 지탱했던 거꾸로 된 Y 자 모양의 큰 철 고리가 건물 벽에 여전히 남아 네덜란드 건물의 튼튼함을 자랑하고 있다.
네덜란드 건물은 튼튼하다. 벽에 있는 거꾸로 된 Y자 모양의 지지대는 벽을 튼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해양박물관 뒷뜰에서 (사진=사공경)
일본 통치기에는 군수품 창고로 쓰였다가 독립한 후에는 국영전력공사(PLN)와 국영전화전보국(PTT)의 창고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 1976년에 자카르타 주정부에서 4차 복구를 했고, 1977년 7월 7일 자카르타 주지사인 Ali Sadikin에 의해 해양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VOC 시대부터 있었는데, 앞에 있는 문은 박물관 부근에 위치한 암스테르담 게이트에서 가져왔다. 박물관 50미터 앞에 순다끌라빠 항에 입출항하는 배를 감독하는 전망대가 서 있고, 길을 따라 있던 조개와 해산물을 파는 빠사르 이깐(Pasar Ikan, 어시장)은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진귀한 조개도 참 많았다. 닭발모양이나 뼈만 남은 생선을 연상시키는 조개나 꼬인 오징어 발 같은 조개도 있었다. 모두 바다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해양박물관에서 바라본 순다 끌라빠 항 전망대 (사진=사공경)
해양박물관은 1,835 점의 수집물을 주제별로 나누어 전시되어 인도네시아 해양 유산을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특히 대항해시대의 신기하고 값진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의 발달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여정과도 호흡을 같이 한다.
2009년 보수 후 한걸음에 달려갔다. 가장 달라진 것은 서관 전시실 2층에 순다 끌라빠 항구를 거쳐간 유명한 탐험가와 바다에 관한 전설이 밀납 인형으로 실제 인물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년이나 앞선 대항해로 동남아에 화교가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해 준 정화장군, 호주와 뉴질랜드를 발견한 쿡선장, ‘지구는 둥글다’라는 것을 입증한 마젤란 등도 있었다.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죽었고 마젤란 배와 남은 선원이 이 항구에 도착했다.) 바다를 지켜주는 빨간 드레스의 아가씨로 기억되는 마조 여신, 배의 침몰을 예견하는 네덜란드 유령선, 바다의 신 포세이돈 등 풍랑이 이는 험난한 바닷길의 역사가 오롯이 이곳에서 배어난다.
해양박물관 서쪽 전시관에서 동쪽 전시관으로 연결된 다리 2층에서 본 해양박물관 전경 (사진= 사공경)
2018년 1월 16일 아침, 박물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반 정도의 건물과 많은 수집품이 불에 탔다. 이후 코로나 19 이전에 박물관의 반 정도를 오픈하고 있었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간 것은 2020년 3월이었다. 반쪽짜리 박물관에서 여전히 풍랑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열도인 인도네시아에서 바다의 중요성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가 아득한 수평선 너머의 다른 세계와 부딪힐 때, 거기에는 늘 소중한 목숨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상대방에 대한 공평이라든가 배려라든가 평등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불의란 힘 있는 자의 특권인가. 이에 저항하는 힘은 언제나 미약한 약자의 몫인가. 강요와 불평등 속에서 이를 묵묵히 받아주는 건 오직 바다뿐이었다.
인류가 바다로부터 얻는 건 엄청나다. 우리는 바다에 잠시도 발을 딛고 살지 못하고 본거지를 뭍에 두고 살지만 바다가 없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한다. 바다의 풍부한 이미지들은 그 불가사의만큼이나 차고 넘친다. 인류 역사상 아무도 바다 전부를 읽어내지 못했다. 바다는 늘 미지의 바다로 남아있지만, 인도네시아의 해양박물관엔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그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 노력한 이들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주 오랜 신화시대의 바다로부터 18세기 순다 끌라빠 항구의 분주한 저녁 풍경까지 그린 디오라마는 우리를 경험하지 못한 과거로 데리고 간다.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선박들의 모습과 항해, 어로 장비들은 길 없는 바닷길을 헤쳐론 발자국들이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각 지역의 배 모형들을 감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항해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바다내음에 취하게 만든 기억에 남는 몇 전시품만 소개하고자 한다. Dugong은 말레이어로 ‘인어’라는 뜻이다. 이처럼 인어로 불리던 큰 두융(Dugong, Duyung)도 박제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두융은 포유류의 한 종으로 열대 바다에 퍼져있고 작은 무리를 지어 산다. 길이는 2-3m 정도이며 몸무게는 150-200kg 정도이다. 임신 기간은 12개월이며 한번에 1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수컷의 엄니와 지방, 눈물을 얻기 위해 많이 포획한다. 두융의 눈물은 향수나 약으로 사용되며 이 생선의 기름은 등불을 켜는데도 사용했다고 한다. 선원들은 배위에서 보았을 때 헤엄치는 모습의 실루엣이 사람을 닮아 두융(듀공)을 인어로 생각했다고 한다. 동성애자인 안드르센은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어서 그 아픔을 작품에서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안드르센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인어공주>라는 동화로 승화시켰듯이 눈물을 향수로 사용한다니 모든 아픔에는 향기가 있는 것이다.
서쪽 전시관에 있는 칼리만탄 문양이 그려진 칼리만탄 배(사진=사공경)
삐니시 배(Kapal Pinisi)는 남부 술라웨시의 부기스(Bugis)족과 마까사르(Makassar)족에서 유래된 전통 범선으로 7개의 돛을 달고 있다. 중요 돛대에 신앙고백이 적혀 있고, 7개의 돛은 이슬람의 성서 코란의 첫 번째 장 Al-Fatihah 기도문 7구절을 뜻한다. 1500년대부터 삐니시 배를 타고 바다를 탐험했지만 14세기부터 이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남부 술라웨시 루우(Luwu)왕국의 사웨리가딩 왕이 청혼하러 삐니시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처음으로 삐니시 배를 탄 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삐니시를 타고 돌아오다가 배는 3부분으로 갈라져, 남부 술라웨시의 아라(Ara)와 따나레모(Tanah Lemo), 비라(Bira) 3개의 마을로 밀려왔다. 아라 마을 사람들이 선체를 만든 후에 따나레모 마을 사람들은 선체를 설치했다. 그 다음에 비라 마을 사람들은 7개의 돛을 올려서 마무리를 했다. 배를 고치라고 명령한 사람의 이름이 삐니시라 비라 지역 사람들은 돛을 삐니시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삐니시는 ‘바람과 파도 소리를 들을 때 바다의 향기로 가득차다’ 라는 뜻이다. 순다 끌라빠 항구에는 아직도 삐니시 범선이 큰 돛으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으로 펼쳐져 있다.
돛을 내린 kapal Pinisi 1999년 촬영 (사진=사공경)
여러 개의 깃발을 달고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인도네시아의 암본까지 항해했던 배를 보면 나는 어느새 동화 속을 거닐고 있다. 1700년대에 만들어진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당시 항해 기간은 1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배에 실었다. 심지어는 닭을 키우는 닭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배 앞부분에는 사자상과 여인상이 놓여있다. 사자는 배를 지켜주고, 여인은 성난 파도를 달래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 배의 원형은 암스테르담 박물관에 있는데 네덜란드 정부가 이 배의 모형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 모형 배는 예전에 배 멀미약인 Anytimo를 선전할 때 사용되었던 배의 실제 모델이다.
많은 기회와 희망을 주는 바다를 마음껏 느끼며 인도네시아가 나름대로 구축한 고도의 해양기술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의 창고가 10개 넘게 있었다고 하니 그 엄청난 착취량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라를 빼앗기고 고통당했을 인도네시아인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외로울 때 나는 박물관에 들러 상상의 나래를 펴고 바다로 떠난다. 다약족이 되어 카누를 타고 마하깜 강을 누비기도 하고, 피터팬이 되어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도 한다. 「날개」의 이상(李箱)처럼 박제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삐니시의 의미처럼 새 한 마리가 ‘바람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다 향기 가득 마시며’ 순다 끌라빠 항구의 허공을 날고 있다. 뭍에 딛는 인어공주의 다리의 아픔을 달래주면서.
삐니시여. 돛을 올리자, 미래를 향해.
통나무로 만든 원시 특유의 문양이 새겨진 이리얀지야 지역의 배 .
뱃전 밖에 있는 기움 돛 줄대가 이채롭다.( 사진= 사공경)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 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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