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140)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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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장오
순다의 어부는 노에 가락을 싣는다
누렇게 바랜 싯구에 막걸리 같은 텁텁한 목소리로 노랠 부른다
가락은 순다 해협의 높은 파고에 이내 묻혀버리고,
뽕밭이 바다로 가던 날도 선명한 높낮이의 노랫가락은 있었다
타클라마칸, 파미르를 지나 너른 초원을 가로지른다
푸른 초원을 달리는 등고선 같은 낙타의 등위로 까만 해는 쉼없이 다가선다
왕서방의 비단이 페르시아만에 이르러 쪽빛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머리 결 곱던 비단이 검은 천으로 염색이 된다
오열하듯 쏟아내는 속내의 아픔은 페르시아만을 뜨겁게 달군다
검은 진주의 눈물은 오대양 높은 파도 따라 구름이 닿는 곳까지 번져가고,
비단으로 감 쌌던 몸 뚱아리들이 까만 천에 덮힌채 밸리 댄스를 춘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가르는 자바 섬의 깊은 산골에도 검은 천들은 펄럭인다
자오선을 따라 별자리를 찾아 떠났던 이들은 순다의 깊은 골짜기에 묻히고,
서걱서걱 뽕잎을 갉아먹던 누에는 보이지 않고 오디의 단내만 풍기고 있다
(사진=조현영 /manzizak)
**시작 노트
오래 전, ‘자바의 알프스’라 불리는 가룻의 빠빤다얀산 주변을 찾았다.
화산재로 덮인 골짜기에 검붉은 오디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뽕나무들……
어릴 적, 누에 방 섶 위에 영근 누에와 경건한 기도를 올리던 어머니 모습 그리고
까마득한 옛날, 비단길을 걷던 상인들의 모습이 산을 오르는 내내 길동무처럼 내
주위를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문명의 이기에 밀려 비단에서 폴리에스테르라는 합성 섬유를 지어 냈지만
시간은 흘러도 바뀌지 않는 내 안의 무엇이 자꾸 나를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
그 곳으로 향하게 한다.
*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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