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147) 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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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
별빛도 가시지 않은 새벽
살금살금 문지방 넘는 소리
삐이걱 숨죽여 문 여는 소리
어슴프레 아침 해가 떠 오르면
새벽 밭에 풀 베고 물 주는 소리
두런두런 부엌문이 열리고
물 가득 오른 호박 오이 옥수수 담은 바구니가 턱
흰 눈처럼 하얀 머리를 한 70대 노부부는
오랜만에 먼 길 온 딸에게 흰 눈처럼 하얀 쌀밥을 해준다
아이들이 입 한 가득 밥을 넣으면
할머니는 신이 나고
아이들이 깔깔 거리며 마당을 뛰면
할아버지 가슴도 뛴다
머리 하얀 70대 노부부는
귀밑 머리 흰 중년의 딸이 밥 먹는 옆에 앉아
부채질을 해준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저것들이 가고 나면 또 텅 비어버릴 이 집에서
전화기만 바라보며 걱정으로 날을 지샐
머리 하얀 70대 노부부는
또 뭘 해줄게 없나 부지런히 밭을 다니고
곧 떠날 딸이 볼까 한숨조차 몰래 쉰다
별빛도 가시지 않은 새벽에도
숨결마다 간절히 기도한다
(사진=조은아)
**시작노트
요즘 우리는 공상 과학 영화 한 편을 찍고 있는 듯 합니다. 이 기괴한 현실 앞에 도피하듯 한국에 나와 정말 오랜만에 친정에 몇 달째 지내고 있습니다. 늘 나에게는 우상이던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나이가 드신 걸 정말이지 처음으로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렁차던 아버지 목소리는 쇤소리로 변했고 늘씬하던 울엄마 허리는 언제 그리 휘셨는지.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해외에 있는 자식들 걱정만 하시던 분들이, 곁에 와 있으니 마음은 편하다 편하다 하시면서, 또 돌아가야 할 일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십니다. 어느 부모의 맘이 다를까만은 요즘은 부쩍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드네요.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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