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110) 예술의 전당,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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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사공 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 무용수들이 잘리잘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입장하고 있다. [이미지: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잘리 잘리~~~. 경쾌한 리듬의 노래가 들린다. 전통 복장을 한 사내 둘이 삐꿀(pikul)을 어깨에 메고 주문한 요리를 실어 온다. 고사리처럼 여린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면서 무용수들이 인도네시아의 4행시 빤뚠(Pantun) 형태로 되어 있는 브따위 포크 송, 잘리 잘리(Jali-Jali)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다가온다.
capek sedikit tidak perduli sayang
내가 좀 피곤하긴 한데 상관없어
asalkan tuan asalkan tuan senang di hati
사랑하는 당신이 기쁘다면
▲ 라이스트타펠 요리. 채소, 고기, 생선, 쌀 등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한 음식으로 구성되며 밥과 함께 먹는다. [이미지: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Tugu Kunstkring Paleis)라는 곳에서 고기나 야채 따위의 많은 요리를 곁들인 인도네시아 음식에서 기원한 네덜란드 쌀요리인 라이스트타펠(Rijsttafel)이라는 요리를 시키면 이렇게 격식을 갖추어 서빙한다. 이곳에서 음식은 눈과 귀로 먹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뚜구 꾼스트끄링 빨레이스에 배어 있는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이곳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철학을 듣게 된다면 이곳은 더 자주 찾게 될 수밖에 없는 곳이다.
▲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전경. [사진: 사공경]
‘Tugu Kunstkring Paleis’는 ‘기념비적 예술의 전당’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외관부터 남다르다. 눈부신 하얀색 건물에 아치형 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유럽의 어느 궁전처럼 절제된 아름다움이 품위에서 잘 나타난다. 2층을 올려다보면 빨간색 차양이 드리워져 있으며, 외벽에 ‘IMMIGRASIE DIENST-DJAWATANIMMIGRASI’라고 새겨져 있는데 예전에 이 건물이 이민국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같으면 건물 용도가 바뀌면 그 전의 흔적은 지워 버리기 일쑤인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지나간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 알 수가 있다.
▲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1층 메인홀인 디뽀느고로룸 [이미지: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네덜란드 건축가 무젠(Moojen)은 흰색이 주는 순결함과 빨간색이 주는 강렬함을 잘 조합해서 이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은 1913년 건축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914년 4월 ‘네덜란드-인디세 동인도 예술그룹’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부터 중요한 전시장 역할을 함과 동시에 고급 사교장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의 옛 모습이 담긴 액자 [사진: 사공경]
1920년에는 ‘바타비아 예술관’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이후 빈센트 반 고흐, 고갱, 파블로 파카소, 샤갈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전시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곳은 또한 외교관, 시인, 예술가, 음악가, 고위 공무원들로 항상 북적거렸다. 그들은 이곳에서 문화와 예술을 논하고 사교를 즐기며 와인과 함께 그들의 지적 호기심을 채웠다.
1942년~1945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위원회 Al A'la 본부(MADJLIS ISLAM ALA INDONESIA)로 사용하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결려 있는 옛날 사진 액자를 보면 건물에 약자로 M.I.A.I 로 적혀 있다.
1950년에서 1997년까지는 중부 자카르타 출입국 관리사무소(이민국)로 사용하였다.
1997년에 수하르또 전 대통령의 말썽꾸러기 아들 토미가 이 건물을 샀다가, 2003년 당시 자카르타 주정부에서 이 건물을 사들였다.
2008년에 이 건물은 고급 클럽인 ‘부다 바’(Budha Bar)로 바뀌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불교계에서는 연일 시위를 했다. 크고 작은 불상을 여기저기 모셔 두고 은은한 조명 아래서 맥주나 와인 잔을 치켜 세우는 것을 불교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부다 바는 2011년 문을 닫아야 했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뚜구(Tugu) 그룹이 이 건물을 운영하고 있다. 뚜구 그룹은 이 건물을 이 예술의 전당이 문을 열었던 99년 전의 분위기로 완전히 바꿔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란 이름으로 재개관하였다. 1층은 주로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살롱 문화의 오아시스로, 2층은 전시, 공연을 하도록 변경하였다. 이 개관식에는 당시 자카르타 주지사인 조코 위도도가 초대되었다.
뚜구 그룹은 인도네시아 군도의 아름다운 예술, 문화 및 역사를 재현하는데 가치를 두는 것으로 유명하다. 뚜구 그룹은 문화 예술의 자랑스러운 중심지였던 이곳의 아름다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예술의 전당을 보존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 수까르노 룸. [이미지: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이를 위해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장엄한 인테리어를 통해 건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는데, 뚜구의 많은 유물, 장식물들은 설탕 왕 Oei Tiong Ham 가족으로부터 희사 받은 것이며, 뚜구에서 보관하고 있던 수카르노에 관한 유물은 2층 ‘수카르토 방’에 배치하였다.
정문의 아치형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면 금장식으로 된 MN라는 상징 문장이 들어온다. MN는 중부 자바 수라까르타 왕국이었던 망꾸느가라(Mangkunegara)를 뜻한다. 이 문장을 지나 중심 홀에 들어서면 정면 벽에 걸려 있는 대형 유화 그림(9m x 4m)이 우리를 압도한다. 벽에는 중부 자바 수라까르타의 또 다른 왕국인 빠꾸부워노(Pakubuwono) 왕국의 이니셜 PB가 적혀 있는 왕궁 근위대 초소 유물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할 때는 웅장한 분위기 속에서 정복을 차려 입은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왕궁에서 식사를 하는 것 같다.
▲ 디뽀느고로 룸의 정면에는 안하르 스챠디브라따가 그린 대형 유화 <자바의 몰락>이 걸려 있다.[이미지: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정면 벽에 걸린 대형 유화의 제목은 <자바의 몰락>이다. 이 그림은 1830년 3월 28일 중부 자바 마글랑(Magelang)에서 네덜란드 식민정부 군대가 디뽀네고로 왕자를 체포하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다. 이 작품은 뚜구 그룹 대표인 안하르 스챠디브라따(Anhar Setjadibrata)가 그렸다. 안하르는 작품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직접 바라보는 입장에서 디뽀네고로 왕자에게 마지막 마실 물을 주는 인도양 바다의 여신인 냐이 로로 끼둘(Nyai Roro Kidul)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JW Pieneman이 그린 ‘Diponegoro 왕자의 체포’ 와 Raden Saleh가 그린 같은 테마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린 그림이다.
▲ 물따뚤리 방 [이미지: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자바의 몰락> 유화 뒷편에 ‘물따뚤리 방’이 있다. 안하르가 물따뚤리라는 필명으로 <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라는 소설을 집필한 에드와르드 두웨스 데커르(Edward Douwes Dekker)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딴 방을 마련했다고 한다.
▲ 영화 <막스 하벨라르>의 포스트 [사진: 사공경]
이 방 입구 벽에는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가 합작으로 제작한 영화 <막스 하벨라르>의 포스트가 벽면에 붙어 있다. 영화 속의 하벨라르와 사이자(Saijah), 아딘다(Adinda)가 영화 포스트 안에 있다. 제작비 3백만불. 그러나 반뜬(Banten) 지역 주민들을 너무 참혹하게 그렸고 원주민 군수가 악랄하게 착취하는 장면 등이 있다는 이유로 영화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었다. 상연 금지의 실제 이유는 이 영화를 통해 수하르토 정부의 부정부패가 최근의 일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악습임을 인식하게 되고 재확인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 [이미지: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이 방에는 막스 하벨라르 소설 내용과 시대 분위기를 전해줄 수 있는 다양한 장식물로 꾸며져 있다. 예를 들어 당시 네덜란드 식민 통치자와 자바 지역의 귀족들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다. 특히 배불뚝이 모습의 자바 남자 귀족 사진이 걸려 있는데 이는 같은 동족인 자바인들의 고혈을 쥐어 짜는 것을 잘 상징하고 있다.
▲ 물따뚤리가 연설하는 모습 [사진: 사공경]
특히 물따뚤리가 굶어 죽지 않고 맞아 죽지 않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해 르박 지도자들에게 연설하는 장면도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거의 절규가 저절로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오늘, 법을 어겨 가면서 획득한 더러운 소득에 대해서는, 그리고 착취를 통해 얻은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더러운 일은 여기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는 악랄한 귀족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며 우회적으로 연설한다.
“자, 여러분, 여기 가난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우리들의 임무가 있습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만약 알라가 우리들의 삶을 보호한다면, 우리들의 비옥한 땅은 풍성하게 넘쳐 날 것입니다.”
막스하벨라르 발간 이후, 1870년 드디어 식민강제작물 재배 시대가 종료되고 식민윤리정책 시대가 시작된다. 마침내 1901년 빌헬미나 여왕은 윤리정치를 인도네시아 식민통치 정부의 정책으로 선포하는데, 관련 사진도 이 방에 전시되어 있다. 이 윤리 정치는 세 가지 중점을 두었는데 관개 치수, 교육 그리고 인구의 평균적 분산화였다.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한 율리아나 공주가 세례 받는 사진도 걸려 있다. 이 방에 강제 작물재배. 식민 윤리정책, 독립선포까지 다루고 있다. 또한, 소설 제목은 1988년 “막스 하벨라르” 표 커피로 다시 태어나 공정무역의 지평을 열었다.
‘물따뚤리 방’을 나오는데 헐벗은 사이자가 아딘다를 생각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잔인하게 죽어가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서 달아날 수 없었던 붉은 세월 속의 물따뚤리가 거기에 있다. 진리와 정의를 신봉하며 억압받는 민중의 보호자인 그는 더 넓고, 더 멀리, 더 깊은 곳까지 퍼져 있는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다가 정작 눈앞에 당면한 간단한 행정 의무들을 종종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가끔은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공격하며 그 용기를 허비하기도 했다.
▲ [사진: 사공경]
물따의 방에는 그의 삶과 죽음이 있다. 1820년 3월 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Korsiespoorsteeg에서 출생한 집은 현재 물따 박물관이 됐다. 그가 숨을 거둔 집의 사진도 걸려있다. 친구들과 독자들이 마련해 준, 라인(Rhein) 강가에 있는 Ingelheim am Rhein에 위치한 집이다. 그때가 1887년 2월 19일이었다. 그의 유해는 1887년 2월 23일, 독일 Gotha에서 화장되었다.
▲ 수지 옹 바 [이미지: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사뭇 다른 분위기의 ‘수지 옹 바’(Suzie Wong Bar)도 있다. 이 방에 들어서면 1960년대 홍콩의 술집 풍경이 물씬 풍겨 나온다. 안하르는 주인공 수지 옹의 자유분방했지만 치열한 삶을 높게 보고 이 방을 마련했다고 한다. 리차드 메이슨 (Richard Mason)의 유명한 소설을 윌리엄 홀덴 (William Holden)과 낸시 콴 (Nancy Kwan)이 주연한 이 영화는 1950 년대 후반, 아름다운 소녀 수지옹(Suzie Wong)과 방금 홍콩에 도착한 영국 화가, Robert Lomax 사이의 쓰라린 사랑이야기이다. 아주 다른 두 명의 외로운 사람들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에 성공한다는 줄거리로 당시 히트작이었다. Suzie Wong Bar는 1960 년대에 Menteng Jakarta에 있는 전설적인 영화관에서 가져온 두 개의 거대한 포스터로 장식되었다. 실제로 영화에 등장한 전시된 인력거는 거대한 붉은 등불, 장식품들과 함께 1950년대 전후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의 세트 장면이 연상되며 병풍에는 이 영화의 감독 주인공 이름들이 적혀 있다.
▲ 수지 옹 바 [이미지: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세상과 당당하게 대결했던 물따뚤리와 디뽀네고로 왕자. 사회 악에 외면하지 않고 진정한 인간의 길을 슬프고도 강렬하게 살아온 그들의 삶은 나를 열정으로 휘감아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 여성의 치열한 삶을 뒤로 하고 2층으로 올라가면 ‘고백의 방’이 나온다. 비밀스럽고 우아하게 꾸며진 이 방에 들어서면 누군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수까르노 방 [이미지: 뚜구 꾼스끄링 빨레이스 웹사이트]
‘고백의 방’ 맞은 편에 있는 인도네시아 독립의 아버지이며 예술을 무척 사랑했던 ‘수카르노 방’을 지나면 그 옛날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전시했던 전시장이 나온다.
전시장을 지난 베란다로 나가면 지나가는 기차 소리도 듣게 되고, 초록의 나무 사이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게 되면 몽환적인 과거로의 여행으로 떠나게 된다.
Tugu Kunstkring Paleis는 혁명의 거리이자 문화예술의 거리인 멘뗑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든다. 브따위 사람을 상징하는 ‘잘리잘리’가 있어서 예술의 거리이자 독립의 거리인 찌끼니가 더 빛나 보인다.
내가 때로 힘들고 지칠 때는 이곳에 들러 경쾌한 ‘잘리 잘리’ 음악에 이색적인 음식 서빙을 받은 후, 세상에 온 몸을 던진 인물들로부터 영감과 위로를 받고 싶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알아보고 기릴 줄 하는 뚜구 그룹의 열정과 심미안을 닮고 싶다.
*Tugu Kunstkring Paleis: Menteng Jl. Teuku Umar 1번지
*잘리잘리는 브따위 사람을 상징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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