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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22) 천 개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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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413회 작성일 2018-02-01 10:32

본문

<시와 경계 2017 겨울호 발표작>
 
 
천 개의 문*
 
 
                                       채인숙
 
 
저녁 무렵 자바 섬 북쪽 항구에 닿았습니다
바람만이 문을 열고 드나드는 집에서
할머니가 물려 준 초록 레이스로
옷을 지어 입은 여자를 만났습니다
무엇도 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여자는 자라서
겨우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새벽 다섯 시의 창녀*처럼 시를 쓴다고
지친 얼굴로 웃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연애편지를 쓰려던
분홍 볼펜을 여자에게 주었습니다
두 슬픔이 만나
천 개의 문이 되는 집 앞에서
당신이 부르다 울었던
몇 곡의 노래를 떠올렸습니다
세월이 거짓말을 가르쳐 주었다고
쉽게 부서지는 것들만 사랑하였다고
천 개의 문고리마다
당신에게 보내는
첩첩산중의 마음이 걸렸습니다
 
 
*중부 자바 스마랑의 라왕세우(Lawang sewu)
*에밀 시오랑의 글에서 인용
 
 
<시작노트>
다음 생의 운세
  • 다시 태어나면 살던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으로 살 것이다. 원래의 자리에 나무 의자를 놓고 가만히 앉아서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을 떠나 보내고, 겨울을 맞을 것이다. 아이들을 낳고, 곁을 내어주고, 마침내 장성한 모습으로 길을 떠날 때까지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 친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의 언어 따위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는 곳이 고향이 되는 법은 없다. 시를 쓰는 일로 겨우 마음을 가눌 뿐이다.
(*구글 이미지)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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