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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56) 소련인이 낳은 인도네시아 농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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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991회 작성일 2018-10-0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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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인이 낳은 인도네시아 농부 아들
 
배동선 /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저 친구가 누구 염장을 지르려 멘뗑 대로 한 복판에 저리 꼿꼿이 서서 어머니를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와는 20년 넘게 마주치면서도 말 한 마디 섞지 않고 살지만 그것도 나름 일관성이라 생각해 높이 평가합니다. 전혀 살갑지도 않은 저 친구에게 남다른 관심을 갖는 건 아마 나와 같은 1963년생이라는 동질감 때문이겠죠. 물론 그가 멘뗑까지 오게된 과정과 그간 견뎌낸 시간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호기심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믿지 못하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저 친구의 아버지는 마트베이 겐리코비치 마니저 (Matvey Genrikhovich Manizer)라는 구소련 지도층 예술가였습니다. 1959년 당시 소련 예술아카데미 부원장을 하던 분이죠. 그런 분의 아들이 인도네시아 농부가 되었다니 누가 믿겠어요. 게다가 그는 심지어 농사일을 팽개치고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서겠다며 떨쳐 일어났어요. 소련 말고 인도네시아를 위한 전쟁 말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애써 외면하는 아들 곁에서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만류하는 모양새는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러니 어머니도 당연히 소련사람 아닐까 자세히 들여다 봐도 올림머리 상굴 (Sanggul)을 하고 끄바야까지 입은 완벽한 인도네시아 여인입니다. 저 집안 내력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인 ‘따니’(Tani)란 농부라는 의미의 ‘뻐따니’(Petani)를 줄인 것이니 분명 본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난 언젠가부터 그를 ‘조코 마트베이비치’ 라고 내 마음대로 불러줍니다. 소련인 아버지를 둔 인도네시아인 아들의 이름으로 적당하다 싶죠? 그렇게 불리기 싫으면 난 누구다 자기 이름을 밝히든지. 입은 뒀다 언제 쓰려고?

게다가 이 과묵한 친구가 어딘가 좀 위험스러워보이는 것은 백주 대로에 팔뚝만한 길이의 대검까지 장착한 영국제 리-앤필드 소총 쯤으로 보이는 장총을 어깨에 매고 허리춤엔 권총까지 차고 있기 때문이죠. 그나마 인상이 험악하지 않기 망정이지 어머니가 그런 아들을 애타게 격려하며 먹을 것 담긴 접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양민을 수탈하는 공산당 게릴라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소련인이다 보니 빨갱이로 몰리곤 하는 건 숙명일 수 밖에 없죠. 게다가 그는 앞서 언급한 탄생의 비밀로 인해 예로부터 소련과 인도네시아 사이에서 무려 우정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9.30 공산쿠데타 이후 완전히 반공으로 돌아선 인도네시아에서 마트베이비치는 몇 번씩이나 멘뗑에서 쫒겨날 위기에 처하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저 친구를 보면 한편으로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한 그는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군살 하나 붙지 않습니다. 별로 운동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참 놀라운 일이죠. 그뿐이 아닙니다.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처음부터 스무살로 태어났다는 거에요. 대충 그 정도 나이일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성인이라는 건 보통 스킬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와 그의 어머니는 절대 늙지 않습니다. 낡아 갈 뿐이죠.
 
 
그들에게 다가갈 때마다 어머니의 애닯픈 속삭임이 들리는 듯 합니다.
“아들아, 잘 다녀 오거라.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은 성스러운 일이란다. 하지만 잊지 말거라.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린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겠니? 꼭 살아 돌아오거라. 꼭 돌아오거라.”
 
저 츤데레 마트베이비치는 그런 어머니와 눈도 맞추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죠.
 
“어머니, 내가 꼭 돌아온다잖아요. 그러니 그만 들어가세요.”
하지만 어머니 마음은 그런 게 아니죠.
“이거라도 하나 더 먹고 가거라. 전쟁터는 춥고 배고프다 들었다.”
“어머니, 괜찮다니까요. 들어가시라고요.”
“엄마를 봐서 딱 하나만 더 먹으라니까.”
“ 참, 어머니도….”
 
마트베이비치는 매몰차게 어머니를 외면하고서도 결국 손을 뻗어 어머니가 내민 접시에서 삶은 감자를 한 개 집어듭니다. 진작에 그러지. 저 녀석은, 하지만 저렇게 떠나가면 무사히 돌아올 것 같지 않습니다. 그걸 예견하기라도 한 듯 저 모자가 처음 멘뗑 대로 위에 섰을 때 당시 수카르노 대통령은 그들 발 밑에 이런 글귀를 적어 놓았어요.
 
“자기 영웅들을 존중하는 민족만이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이다.”
(Hanya Bangsa yang menghargai pahlawan-pahlawannya dapat menjadi bangsa yang besar)
 
그래서 그들 곁을 지날 때면 나도 내 동갑친구에게 한 마디 던지게 됩니다.
그래, 조코 마트베이비치, 꼭 살아 돌아와.
 
 
 
*** 빠뚱 뚜구따니(Patung Tugu Tani-농부 동상) 또는 빠뚱 빠흘라완(Patung Pahlawan-영웅동상)이라 불리는
청동상(靑銅像)은 자카르타의 감비르역 가까운 멘뗑 지역에 세워져, 짜삥(Caping)이라 부르는 끝이 뾰족한
밀집모자를 쓰고 독립전쟁에 출정하려 무장한 농민군 청년의 단호함과 끄바야를 입은 어머니의 애절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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