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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68) 물따뚤리 박물관 (Museum Multatuli)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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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717회 작성일 2018-12-21 20:56

본문

<1편에 이어서>
 
물따뚤리 박물관 (Museum Multatuli) 이야기 2
 
사공 경 / 한인니문화연구원장
 
 
물따뚤리 포스터를 보고 있는 바두이 족 사람들
 
1908년 결성된 부미 우또모 (Budi Utomo)는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기 때 지식인들이 최초로 현대적으로 결성한 반 식민 투쟁 단체이다. 단체 결성의 시작은 자바인으로 의사였던 Wahidin Sudirohusodo이다. 그는 자바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1908년 수또모 (Sutomo)에 의해 단체가 구체화 되었다. 이 단체에서 중요한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가가 배출되는데 그 중 한명이 찝또 (Dr. Cipto Mangunkusumo)이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대중적 민족해방운동단체인 Sarekat Islam (Kongres nasional Sarekat Islam)이 1912년 결성된다. 반뜬의 빤데글랑(Pandeglang)에서 개최된 이슬람 회의에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 쪼고로아미노또(HOS. Tjokroaminoto)가 참석했고, 이 회의가 반뜬 주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후, 반뜬에 SI 지부가 결성되었다. 종교 지도자, 귀족 계급, 일반 서민들이 SI에 가입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지도자 중 한 명인 스마운(Semaun)이 반뜬을 다녀 간 후, 1916년까지 세랑(Serang), 라부안(Labuan), 랑까스비뚱에 지부가 설립되었다. 하산(Hassan Djajadiningrat)은 반뜬 SI의 지도자가 되었다. 공산당 다른 지도자들, 알리민(Alimin), 무소(Musso)등이 반뜬을 방문하게 되고, 1923년, 반뜬에 공산당 지부가 설립되게 된다. 
 
 
1926년 11월 12일 반뜬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종교지도자, 농부가 식민정부에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 항쟁은 자바와 수마트라의 몇 개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약 1만 3천명의 사람들이 체포 되었다. 이중 약 1천 300명은 반뜬 지역 출신이었다.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이들을 디굴 (Boven Digoel)로 추방했는데, 파푸아 지역에 있는 그곳은 말라리아 등이 창궐하는 지역으로 들어가면 죽어 나오는 곳으로 유명했다.
수카르노 대통령 시기 때 당시 항쟁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을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로 명명하였다. (1961년 대통령 규정 제15호) 그 중에는 민족의 지도자인 하타와 수탄 샤히리르가 포함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게 식민정부 총독은 과도한 권리(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 특권을 이용하여 식민정부를 위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유배, 감금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가들은 하나, 둘씩 유배를 당했는데, 이중에는 수카르노, 하타, 샤히리르(Syahrir), 찝또(Dr. Cipto) 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1927년-1943년까지 식민 정부 시절에 약 1천명의 정치범들이 디굴에 억류 되었다. 그들의 출신지역은 자바와 서부 수마트라였다. 위 두 지역은 네덜란드 식민 정부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했던 지역이다.
1926년 반뜬 지역 항쟁, 1927년 실룽깡(Silungkang) 항쟁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대항한 인도네시아인 항쟁 중 가장 대규모였다. 이는 인도네시아 독립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설립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첫 번째 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의 진주는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몰락을 가져 왔다. 일본군은 1942년 3월 1일, 반뜬 지역, 북부 해안을 통해 진주했다. 1942년 3월 8일 저녁, 깔리자띠(Kalijati) 수방(Subang)에서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정식으로 항복하게 된다.
영화감독 미스바흐 유사 비란 (Misbach Yusa Biran)의 증언 따르면 일본군이 르박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네덜란드 군은 찌우중 강 교량을 폭파했으나, 별 다른 저항 없이 일본군은 르박에 진입하여 즉시 반뜬의 모든 중요 시설을 장악하게 된다.
 
드디어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한다. 8월 16일, 일본이 연합군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을 열망하는 청년들은 수카르노, 하타를 납치하여 서부자바 렝아스뎅끌록(Rengasdengklok)으로 데려가서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자카르타에 있는 일본 마에다(Maeda) 제독 집(현 독립선언서 작성 박물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고, 1945년 8월 17일 오전 10시, 수카르노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다. 수프라뜨만 (Wage Rudolf Supratman)이 작곡한 국가, 위대한 인도네시아(Indonesia Raya)가 울리는 가운데, 파트마와띠(Fatmawati)가 바느질한 인도네시아 국기가 게양 되었다. 
 
1945년 12월 10일, 수카르노와 하타가 랑까스비뚱에 도착했을 때  반뜬 지역 사회혁명주의자들은 8대(1938~1944) 르박 군수 하디위안군(Raden Tumenggung Hardiwiangun)을 살해하고 심장을 도려내었다. 인도네시아 독립은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식민 잔재를 일소하려는 사회혁명 열기를 가져 왔다. 1945년 말부터 1946년 초까지 반뜬 지역의 모든 군수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움직임의 중심에 시민 지도자인 Ce Mamat이 있었다. 하산(KH Tubagus Hasan)이 10대 군수로 취임했다. (1945~1949)
인도네시아 독립 후, 모든 것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1947년 7월 21일, 네덜란드군의 1차 침공과 1948년 12월 19일 2차 침공으로 전쟁은 격화 되었다.
 
수카르노는 그의 독립 투쟁에 있어 『막스 하벨라르』를 투쟁의 본보기로 삼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따뚤리로 인해서 윤리정책 시대가 열렸고, 실현된 것 중 중요한 것은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제한적인 교육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교육 기회 부여가 네덜란드 식민통치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농장 인력을 위한 기술자, 장인들 육성에 목적을 두었지만 이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향후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발현 시키는 중심 역할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좋은 예가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이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1957년 초, 수카르노는 반뜬의 랑까스비뚱과 세랑 (Serang)을 방문하게 되다.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1901년에 건설된 기차역에서 내렸다. 우리에게 익숙한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모습으로 기차 트랩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또 다른 사진에는 랑까스비뚱이라고 적혀 있는 역사 입구에서 많은 환영객이 그를 맞이하고 있다.
대단한 열기로 주민들은 수카르노를 환영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랑까스비뚱 광장에 모여 들었다. 그곳에서 수카르노는 끓어오르는 정치 열기 속에 인도네시아의 단합과 문맹 퇴치를 외쳤다. 그것만이 다시는 식민지배 당하지 않는 열쇠라고. 그 당시 랑까스비뚱은 자카르타, 부이텐조그(보고르), 렝아스뎅끌록, 자카르타 동부에 있는 까라왕(Karawang), 버까시(Bekasi)와 비교하여 그 명성이 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물따뚤리의 『막스 하벨라르』가 랑까스비뚱의 명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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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시관>은 르박 군 역사에 관한 것이 전시되어 있다. 르박 군 설립 문건과 지도, 성벽지도 및 기타 서류, 르박 군 지역 역대 지도자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바두이 족이 손으로 짠 직물, 나무로 된 직조기, 찌당향 (Cidanghyang) 지역 비문 복제품. 식민통치 시대 때 군수 복장과 휘장, 예술적인 옷걸이도 전시되어 있다. 
 
 
 
 
1828년 12월 2일 르박 군이 창설되었다. 군 창설 이전, 르박 지역을 이끈 인물은 슨자자 (Sendjaja)이다.
나따느가라(Raden Karta Natanegara, 1796~1879)는 보고르 자신가 하급 관리였는데, 네덜란드에 대항한 여성 투사 감빠란(Gamparan)이 일으킨 항쟁을 진압한 공로로 르박 2대 군수가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군수 직을 유지했다. (1830~1865) 전시된 군수 의전 복장은 나따느가라가 착용한 것이다. 막스하벨라르에 등장하는 주민들의 피를 짜는 그 군수이다.

물따뚤리(본명:Edward Douwes Dekker)가 르박 군수보좌관으로 임명된 그 다음 날인 1856년 1월 22일에 르박 지역 지도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그 유명한 장면도 전시되어 있다.

“반뜬, 끼둘(Kidul) 지역의 지도자 여러분, 우리 지역이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분명 뜻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임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 알라가 우리를 여기에 보냈는지를...” 
 
18세기- 20세기 동안의 르박 지역 풍경을 담은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1920년대 랑까스비뚱 광장, 군수 관저, 르박 군수 보좌관 관저가 보인다. 공중에서 바라본 1940년대 랑까스비뚱과 군수 보좌관 관저, 통제관 관저, 감옥, 군수 관저, 커피 집하지, 커피 창고도 보인다. 
요새기 그려진 지도를 통해서도 르박 지역에서도 커피가 강재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90년부터 1939년까지 약 3만 명의 자바 사람들이 남아메리카로 인력송출로 가게 된다. 그 중에는 르박 출신도 있었다. 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근로자로 일 했으며 일부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자료도 전시되어 있었다.  
르박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르박 전통 바틱도 전시되어 있다. 모두 농사에 관한 문양으로 12 종류이며 다른 지역에 비해 정갈한 느낌이다. 
 
 
< 7 전시관>은 랑까스비뚱과 연관이 있는 유명 인사 여덟 명의 인물을 묘사하였다. 마리아 울파(Maria Ulfah), 독립운동가 하지 아구스 살림(Haji Agus Salim), 공산주의 딴 말라까(Tan Malaka)와 스마운(Semaun), 록밴드그룹 유진(Euguni van Beers), 마스 다르나 꾸수마(Mas Darna Kusuma), 영화감독 미스바흐 유사 비란(Misbach Yusabiran), 시인 렌드라 (WS. Rendra)이다. 
 
렌드라(W.S. Rendra, 1935.11.7.)는 시인, 극작가, 단편 소설가로 1967년 족자에 ‘Burung Merak'이라는 극단을 창립한다. 막스 하벨라르에서 영감을 받아, 1990년 그는 ‘랑까스비뚱 사람들’이라는 시집을 출간한다. 시집에서 그는 식민통치자들의 부패상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소시민의 무력함을 노래하는 시도 있고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유학하는 학생의 눈에 비친 조국의 암담함을 노래한 시도 있다. 
 
마리아 울파 산또소(Maria Ulfah Santoso)(1911.8.18~1988.4.15) 반뜬 세랑에서 출생하였으며 인도네시아 여성으로 최초로 네덜란드 Leiden 대학교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46년~1947년까지 샤흐리르 내각에서 사회부장관을 역임했다. 1950-1961년까지 인도네시아 영화검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게 된다. 
 
미스바흐 유사 비란(Misbach Yusa Biran,1933.9.11.~2012.4.11)은 랑까스비뚱 출신으로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단편 소설가, 다큐멘터리 영화의 선구자이다. 1975년 설립된 영화 필림보관소 관장이며, 자카르타 예술 교육 협회의 대표도 역임했었다. 1950년대, 학생 시절에 이미 영화감독을 시작했으며 인도네시아 영상 보관소를 만들었다. 감독한 영화 중 <반짝이는 빛 뒤에서, Di Balik cahaya gemerlapan>는 1967년 인도네시아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딴 말라까(1897.6.2.~1949.2.21.)는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독립 운동을 하였으며 MURBA 당을 창설한 인도네시아 민족영웅이다. 랑까스비뚱은 반뜬 지역 혁명가들의 중심지였다. 딴 말라까는 여섯 명의 청년과 함께 자카르타 청년회의에 반뜬 지역 대표로 선출된다. 독립 후, 그는 좌익의 지도자가 된다. 마디운에서 공산당 폭동이 1948년 11월 종식된 후, 꺼디리(Kediri)로 가서, 공산당 잔류 세력을 규합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총살형에 처해진다. 1963년 3월 28일, 수카르노 대통령 결정 제 53호에 의거 딴 말라까는 국가 영웅으로 추서 되었다. 
 
하지 아구스 살림(Haji Agus Salim, 1884.10.8~1954.11.4)은 1961년 12월 27일, 인도네시아 대통령 결정서 제 657호로 국가 독립 유공자로 추서 되었다. 1915년 살림은 이슬람 연합(SI)에 참여하게 되며 쪼고로아미노또를 이어, SI 두 번째 지도자가 된다. 
1946년~1950년 동안, 그는 인도네시아 정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위대한 어른”이라는 호칭을 받게 된다. 그는 외무부 장관, 명예 기자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지금까지도 그의 날카로운 비판은 인도네시아 저널리즘의 표상이 되고 있다. 
 
탈 식민 움직임이 발아된 랑까스비뚱에 이처럼 비판의식과 날카로운 저항 정신으로 굳건히 물따뚤리를 따르고 있는 인물들이 많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 전시관에서도 물따뚤리는 외치고 있었다. “성장하고 배고프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라. 행동, 아픔, 감정이 없는 침묵은 죽음이다.”라고.
 
어느 누가 물따뚤리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인도네시아 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그 시대에 지배자인 기독교 백인이 이슬람에 젖어 살고 있는 반뜬 주민을 위해 울부짖으며 나설 수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곳은 가난한 지역이고 이 점이 내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라는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뭄의 땅 위에 비를 내리게 하고, 목마른 꽃에 이슬을 맺히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하루의 노동에 지쳐 있는 사람을 찾아 위로 하고, 더 이상 차용금을 내지 못해 길가에 주저 않은 사람들을 위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은 곳에 나를 있게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볏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볏단 스스로가 파종 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신이시여, 언젠가 내가 당신의 아들이었음을 말하기 위해 나를 이곳에 보내셨는지를> 
인도네시아 인들과 함께 흘러가고자 했던 물따뚤리의 연설을 가슴에 담고 박물관을 나왔다. 
 
인도네시아 탈 식민정신과 반 식민투쟁에 있어 물따뚤리가 차지하는 의미에 대한 질문에 우바이관장은 “물따뚤리는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반대했습니다. 피 식민인에 대한 연민과 인간애를 강조했습니다. 『막스 하벨라르』는 윤리(식민)정책을 시행될 수 있게 하는 기초가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독립의 필연성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막스 하벨라르』를 읽게 된 인도네시아 인들은 네덜란드의 재침략에 대항하여 죽창으로 단결하여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고, 1949년에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 뒤에도 세계 다른 지역의 탈 식민지화의 물결을 이끄는 촉매가 되었다. 
 
시인 렌드라는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신의 세계에서 저울질되고 평가된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가 억압 받고 핍박 받는 힘없는 자들의 해방구로, 도시 빈민의 희망 집결지로 노래한 랑까스비뚱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사회정의와 평등에 대해 랑까스비뚱의 찌우중 강은 여전히 침묵하며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간다. 맞아 죽고 굶어 죽었던 시신들의 피로 물들었다는 강물에 깨끗이 손을 씻는 위정자처럼 강물은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고 흘러만 간다. 강이라는 이름으로 위선이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우리는 수카르노가 완성할 수 없었던 바로 그 혁명, 시민들이 완성할 수 없었던 4.19혁명, 6월 항쟁에서 여전히 시민 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물따뚤리 박물관 / Jl. Alun-Alun Timur No.8, Rangkasbitung, Kabupaten Lebak, Banten 42312
 
* 참고문헌: www.readingmultatuli.co / www.museummultatuli.id
          김영수논문 ‘탈식민 행위의 성과와 한계를 중심으로’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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