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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58) 밤의 그림자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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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016회 작성일 2018-10-16 13:55

본문

밤의 그림자 극장
 
시. 채인숙 
 

1
조글로 지붕으로 사나운 밤비가 들이친다 씨앗무늬 사롱을 걸친 맨발의 남자가 하염없는 비를 바라보며 섰다
 
허리 뒤춤에 꽂은 단도에는 신비한 힘을 지닌 새 머리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램프에 불이 켜지면 밤의 장막이 네모반듯하게 접혔다가 사방천지 둥글게 퍼져 나간다
 
 

2
남자는 그림자 인형의 마지막 무두질을 끝냈다 물소 가죽을 오려 아홉 명의 신들과 다섯 영웅, 한 여자의 그림자 인형을 만들었다 
 
자정이 오기 전, 영웅은 신들과의 전투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것이고 관객들은 졸린 눈을 번쩍 뜨며 박수를 칠 것이고 영웅은 연인의 순결을 의심한 자신을 자책하며 장막 뒤로 사라질 것이었지만 
 
비는 그칠 줄도 모르고
비는 그칠 줄도 모르고
 
악공도 가수도 기별 없이 찾아오지 않는 밤 
 
 

3
우리의 그림자극은 오늘도 막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깜보자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는 마당을 가로질러
마지막 나무 대문을 닫으러 갑니다
당신이 없어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망고나무 그늘이 둥글게 자랍니다
 
밤이 만드는 암막은 우리의 무대였으나 
빗물에 떠내려간 당신은 영영 소식 없습니다
부질없는 한 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생을 바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오늘도 그림자를 치켜들고 홀로 춤을 춥니다
당신도 없이 겨우 늙어가고 있습니다 


(열린시학 2018 가을호 발표작)
 
시작노트: 
북회귀선을 넘어 와 20년을 살아 온 남쪽 나라는 신화의 나라다. 신화들이 마치 현재처럼 살아있는 곳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에 신화를 장치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림자 극이 열리는 밤의 극장에는 잃어버린 사랑을 찾으려는 신과 인간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 극장에서 배우도, 악공도, 가수도 아닌,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는 물소 가죽으로 그림자 극에 쓰이는 인형을 만드는 남자였다. 내가 만들고 내가 노래하는 그림자 극장의 신화 속에서, 그의 무두질과 그가 비를 맞으며 서 있던 밤과 그의 기다림이 내게는 무한의 신화였다. 
 
                 (사진=채인숙) 
 
*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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