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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29) “장소의 혼(Genius Loci)” - KERATON RATU B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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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561회 작성일 2018-03-23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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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혼(Genius Loci)” - KERATON RATU BOKO
 
 
김의용
군나다르마 대학(University Gunadarma) 건축학과 교수
PT.MAP Architects & Engineers Indonesia 법인장
 

시간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진 장소에는 독특한 정체성(Identity)이 만들어진다.  장소의 정체성에 역사적 이야기가 가미되고, 삶의 흔적들이 남겨지게 되면 그 장소에는 바로 "장소의 혼"이 깃든다.

문화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다면 사실 일반인들이 건축의  유적/유적지를 감상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유명 관광지에서 압도적인 크기, 화려한 장식,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때문에 감동하는데, 이 모든 감동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생경함 때문에 일어난다. 
 
유적지에도 이러한 생경함은 존재하지만,  과거의 파편들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야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 불편함이 어쩌면 유적과 유적지에 대한 감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유적지는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그리고 건축적인 지식이 없으면 원형을 자유롭게 상상하기 어렵고, 감동받기도 쉽지 않다. 아니면 상상하고 추론하는 것을 최대한 즐길 수 있어야지만 유적과 유적지의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결국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알게 되는'것이다. 

인도네시아는 무릇 도서국가답게, 외부에서 이입된 종교와 문화에 상당히 개방적이며, 이 개방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자신들의 토착종교와 문화에 결합시키는 담대한 포용력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런 개방성/포용력들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도 정복한 왕조의 유산들을  철거하거나 없애버리기 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와 결합시키는 양태를 보여주는 이유일 것이다.
 
<그림 1 >라뚜 보꼬의 전경. 남겨진 기초의 흔적들로 건축물의 높이와 크기를 상상하고,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하며 장소를 체험하는 것은 색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유적지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풍부한 역사적/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는 도시 족자(Jogja)에서 당연히 백미는 보로부두르(Borobudur)와 쁘람바난(Prambanan)이다. 이 두 유적지가 가지고 있는 역사문화적 가치는 이미 유네스코도 인정할 만한 독특함과 뛰어남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이 두 유적지는 이 도시를 지배했고 불교문화와 힌두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문화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는 곳은 거의 폐허처럼 보이는 라뚜 보꼬(Ratu Boko)이다.
 
종교시설이 아닌 라뚜 보꼬는 일상적으로 사람이 거주했던 유적지여서 사뭇 다른 유적지와는 다른 감동과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사람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살았던 공간, 그런 공간적 쓰임새가 2018년에 방문하는 현대인에게도 다른 유적지(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과는 차별화된 감동과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놀라움, 생경함, 독특함 보다는 비애, 허무, 쓸쓸함 같은 차분한 내면의 감동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평화로운 언덕에 세워진 수도원'을 의미하는 이 궁전은 8세기경 불교왕조에 의해 족자의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200미터의 언덕 위에 지어지게 된다. 이후 이 궁전은 힌두국가인 마타람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어 불교와 힌두문화가 공존하는 건축 양식을 띄게 된다.  두 개의 사원과 두 개의 궁전건물로 이루어진 이 궁전은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성향들이 느껴지는 듯 하다. 
 
공주인 딸을 위한 집을 짓는 왕이지만 아버지로서의 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느낄 수도 있다. 왕궁이면서도 건축물들의 소박한 크기와 구성들이 매우 인간적인 스케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배자의 정서와 성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건축적 구성인 것이다.   
 
<그림 2>  족자 시내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자리한 왕국의 지형학적 위치를 말해주는 사진이다.
무릇 동양의 철학은 밖에서 보는 외관의 중요성보다는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불교철학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이 궁전의 건축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 배치로 이루어진 이 유적지는 수학적 질서가 만들어주는 단아하고 정갈한 공간적 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복잡한 사고가 필요 없는 고대 시대의 단순한 삶의 방식과 철학적 사유방식이 이러한 성과를 만들어낸 것 같다. 왜냐하면 궁전은 신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이었기 때문에 장엄함, 거대함보다는 삶의 공간이 더 중요한 가치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궁전이 위치한 산의 정상이라는 높이에서 이미 차별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평지의 기념비적 건축물이 확보해야하는 높이의 딜레마가 해결된 점도 인간적 스케일의 건축물이 축성될 수 있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라뚜 보꼬는 거대한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보로부두르와는 다르며, 화려한 장식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쁘람바난과도 또 다르다. 이곳에는 굳이 따지자면 아마도 수많은 시간들이 쌓여있는 충첩된 시간의 공간이 주는 잔잔한 감동이 있는 것 같다. 유적지에서 느낄 수 있는 오래된 시간의 냄새, 따스하지만 불쾌하지 않은 바람에서도 느껴지는 옛 시간, 과거 건축물의 흔적들, 인도네시아의 측은한 문화유적 관리상태 등등,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더욱 더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애잔함이 천박하거나 저급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던 시간의 옷을 입으면 그만큼의 품위를 가지게 된다.  
 
<그림 3 >대문이 마치 현실과 초현실 경계처럼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듯 하다. 거대하지 않지만 충분히 상징적이며 인상적이다.
 

기개 넘치고 당당한 보로부두르, 화려하면서도 겸손한 쁘람바난, 그리고 쓸쓸하지만 슬프지 않으며 침묵하나 무겁지 않은 라뚜 보꼬. 미학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은 비극에서 만들어진다 한다. 이 유적지에서 느낄 수 있는 장엄한 비애감은 유적들만이 줄 수 있는 시간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과 감동일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는 않는 것들에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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