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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152) 자카르타에서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보낸 7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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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8,991회 작성일 2020-08-2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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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서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보낸 7개월
 
조인정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2019년 2월 논문 자료 수집 차 자카르타에 한 달 간 체류했다. 체류 기간 중 주말에는 로컬 NGO의 러닝센터를 찾아 학생 및 학부모, NGO 교사들을 인터뷰했고, 주중에는 아트마자야 대학교(Atma Jaya Catholic University of Indonesia)의 국제처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 전략 개발과 홍보 책자 제작 등을 돕는 봉사활동을 했다. 일본으로의 출국 이틀을 앞두고, 대학 국제처 오피스에서 마지막 업무를 하던 중, 함께 일하던 현지인 친구가 아트마자야 대학의 소셜미디어에 올려진 공고 하나를 내게 보여주었다.
 
“인정아, 일본으로 돌아가면 일본 친구들에게 이 정보 좀 공유해 줄래? 접수일이 10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야.”
 
친구가 건넨 것은 인도네시아 교육문화부와 외무부가 협력하여 주관하는 외국인 학생 대상 장학프로그램 ‘다르마시스와(Darmasiswa)’였다. 아세안 협력을 위해 1974년 도입된 정부초청 장학프로그램인 다르마시스와는 초기에는 아세안 국가 내 학생들만을 선발했지만 점진적으로 장학금 선발 대상 국가를 넓혀갔다. 1980년대 약 10개국이 참여했던 다르마시스와는 2019년에는 한국을 포함한 101개국이 참여하는 장학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다르마시스와에 선발된 학생들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총 72개 대학 (2020년 기준) 중 한 곳에서 인도네시아 언어, 예술, 문화 등에 대해 10개월 또는 12개월을 선택하여 학습하고 있다.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친구가 보내준 공고를 상세히 살펴보았다. 그 동안 인도네시아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라 장학프로그램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매년 방학에 인도네시아를 찾았고, 빈곤 아동들을 위한 교육봉사를 해왔다. 교육봉사에서 간단한 인사말 수준의 인도네시아어 밖에 할 수 없었기에, 내 모든 수업은 현지인 친구의 동시통역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 했다. 바디랭귀지와 눈빛으로 인도네시아 학생들과 제약적인 소통을 했던 그 때 자신과 다짐했다. 언젠가 반드시 아이들과의 원활한 대화와 소통을 위해 꼭 인도네시아어를 배울 것이라고 말이다. 더욱이 논문 집필을 위해 현지인들과 인터뷰를 하고, 인도네시아어로 쓰인 교육 관련 통계 자료를 접하면서 인도네시아어 학습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꼈다. 일본에 도착한 나는 분주히 다르마시스와 원서 작성을 시작했다.
 
4월 학기가 시작되어 나는 석사 논문을 쓰다가도 다르마시스와 합격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간혹 인터넷에 아트마자야 대학을 검색하고 학교 교정을 사진으로 보며 그 곳에 서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드디어 5월에 발표가 났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한국 장학생 2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1지망으로 지원했던 자카르타 소재 아트마자야 카톨릭 대학교에서 1년간 인도네시아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클리셰 같은 진리가 실현된 것이다.
 
자카르타에서의 소소한 일상
오전 9시 15분 나는 꼬스(kost, 게스트하우스 및 원룸 하숙집 등의 인도네시아의 보편적 숙소)를 나섰다. 10시 15분에 인도네시아어 수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차도인지 보행로인지 구별이 안 되는 학교 통행 길을 건너는 것은 매일 연속되는 나의 피할 수 없는 미션이다. 줄지어 지나가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보행자를 위해 멈출 기색이 전혀 없는 듯하다. 현지인 친구들이라면 분명 한 손을 내밀어 차를 멈춰 세우고 거리를 당당하게 건넜겠지만, 이는 내게는 마법 같은 광경일 뿐이다. 결국 오늘도 한참을 기다리다가 모든 오토바이와 차가 멈춘 시점에 재빨리 그 틈을 비집고 길을 건넜다. 거리에는 푸르른 열대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로수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식물들을 보며 감탄을 자아내던 것도 잠시, 찌는 건기의 뜨거운 태양아래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땀이 한 줄 한 줄 더 흐르는 것을 느낀다. 육교를 건너고, 울퉁불퉁한 좁은 보행로를 30분 정도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험한 길을 굽이굽이 걸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한국에서 사온 신발은 눈에 띄게 점점 해져갔다.
 
매일 왕복 한 시간씩 걸어 통학하는 나를 보며 현지 친구들은 내가 대단하다고 혹은 무모하다고 말했다. 차량·오토바이 호출 서비스인 그랩(Grab)이나 고젝(Go-Jek)을 불러 등하교를 하는 것을 추천해 주며 말이다. 하지만 아직 인도네시아어가 서툴러 간단한 자기소개 밖에 할 수 없던 내게, 그랩과 고젝을 호출하면 받아야하는 운전수들의 확인전화 또는 메시지가 조금 두려웠기에 호출을 쉽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랩이나 고젝을 이용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악명 높은 자카르타의 교통체증 때문이었다. 학교까지 걸어서 30분이면 되는 거리를 차를 타면 훨씬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아트마자야 대학교에서 오전 2시간(10:15~12:15) 동안, 인도네시아 어학연수인 비파(BIPA, Bahasa Indonesia bagi Penutur Asing) 수업을 들었다.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인도네시아에 온 며칠 후 나는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UI, Universitas Indonesia)에서 인도네시아어 레벨테스트를 치렀다. 스피킹 섹션에서 시험관이 인도네시아어로 질문하면 영어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라이팅 섹션에서는 인도네시아로 적힌 시험문제를 이해할 수 없어 시험지에 “저는 인도네시아로 쓸 줄 모릅니다”라고 적어냈다. 당연히 초급과정인 BIPA 레벨 1 클래스에 배정되었다. 아트마자야 대학의 BIPA레벨 1 클래스는 한국, 일본, 대만, 호주에서 온 학생들 1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학(원)생 신분이었던 나와 대만 친구를 제외하고는 우리 반 학생들은 인도네시아의 기업에서 근무하거나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된 직장인, 직장인의 배우자분이었다. 우리 수업은 Ima선생님의 언제나 활기에 넘치는 한 마디 “Apa kabar semuanya?(모두들 안녕하세요?)”로 시작되었고, 우리는 작은 강의실에서 둥글게 둘러앉아 롤플레이(role-play) 등 참여형 수업 방식을 통해 즐겁게 인도네시아 기초 문법을 학습했다.
 
“인정아 가자!”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면 항상 나와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두 분의 한국인 주재원 아저씨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학교 옆에 위치한 작은 백화점으로 향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배운 인도네시아어를 최대한 활용해가며 음식점 종업원에게 점심을 주문했다. 내가 가끔 버벅이며 주문 할 때면 아저씨들께서 도와주었고 이렇게 현지 생활에 적응해 갔다. 아저씨들은 식사를 하면서 내게 자신들의 이런저런 인생이야기, 인도네시아에서의 근무 실상 등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러한 그 분들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내가 미래에 어떠한 인생을 설계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어쩌면 그분들에게 있어 단지 가벼운 대화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소중한 인생의 교훈이었던 셈이다.
 
비파 레벨 1 클래스 동기들과 학기말 여행으로 방문한 데폭(Depok)에서.(사진=조인정)
 
오후 1시 30분, 진정한 인도네시아에서 홀로서기는 이 때 부터 시작이었다. 장학프로그램 원서 접수 시에는 하루 4시간이라고 소개되었던 수업 스케줄은 학교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인도네시아 도착 며칠 전에 2시간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도네시아 홀로서기의 발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시간의 오전 수업을 마치면 하루의 남은 시간은 모두 자유였던 것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논문 집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던 나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갑자기 주어진 자유 시간에 공허함을 느꼈고 맥이 풀렸다. 하루를 어떻게 가장 생산적으로 활용하여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도 잠시 곧 이전만큼 알찬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아트마자야 대학교는 고등교육 국제화에 발맞추어 활발한 외국인 유학생 유치 전략을 벌이는 중이었고, 한국은 핵심적 국가였다. 아트마자야 대학은 경기도와 대구 소재의 대학들과 교환학생 및 썸머스쿨 프로그램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학 간 협약을 모색 중이었다. 아트마자야 대학의 부총장과 국제처장은 한국인인 내가 한국-인도네시아 대학 간 협약 과정에 있어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부탁했고, 나는 한국 대학 담당자들이 아트마자야 대학을 방문하여 회의를 할 때 영어-한국어 번역을 하는 등의 일을 도왔다. 아트마자야 대학을 돕는 일 외에도 런던대학에 계시는 교수님의 일을 돕기도 했고, 수업시간에 배운 인도네시아어를 복습하고, 현지인 친구들과 맛집이나 카페를 다니면서 자카르타에서의 일상을 즐겼다. 더욱이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사공경 원장선생님 덕분에 꼬따뚜아(Kota Tua) 역사 연구일,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역사가 있는 문학상 시상식에서의 진행, 해외 외교관들을 만나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 알리기 등의 보람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두 국가의 화합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여 온 인도네시아 한인교민들을 만나 교류하며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다르마시스 장학생으로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는 것 외에도 여러 업무를 맡으며 한국-인도네시아 교육 및 문화예술 교류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 같아 너무도 감사했다.
 
아쉬운 작별
2020년 2월 말까지만 해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없던 인도네시아에도 곧 코로나19는 점진적으로 확산되었고 아트마자야 대학교도 3월 중순부터 캠퍼스 문을 닫았다. 대학의 모든 수업은 대면수업에서 온라인수업으로 변경되었다. 나 또한 8월 말 다르마시스와 프로그램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려 했던 본래 일정을 바꿔 4월 초에 귀국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선택한 인도네시아 유학이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떠나는 길은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을 떠나는 비행기 창밖을 통해 점점 작아지는 자카르타 도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카르타의 따뜻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는 도시와 조용히 작별했다.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던 BIPA 레벨2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다르마시스와 장학 프로그램을 졸업했다. 8월 현재, 한국에서의 생활도 어느새 5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인도네시아로 떠날 온갖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도 벌써 작년 이 시기이다.
 
한국에서의 달라진 일상, 일 년 전과는 다른 모습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내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매일같이 인도네시아 음악을 듣는 일이다. 인도네시아 음악의 가사와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자카르타에서의 아련한 추억에 젖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리고 자카르타에서의 소소한 일상의 기억들을 되새겨 본다. 매일 보던 캠퍼스의 풍경과 도로를 꽉 메운 오토바이와 차들, 하루 다섯 번씩 들리던 모스크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Azan)소리, 저녁 집을 돌아오는 길 까끼 리마(kaki lima)에서의 사떼 굽는 냄새와 나시고랭의 냄새. 내 인생의 소중한 일부가 된 7개월 남짓의 자카르타에서의 생활은 20대 중반의 청춘을 다채로운 감성으로 물들였던 것이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서둘러 떠나야 했던 그 곳. 인도네시아는 곧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는 연인인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그리움이 짙어질수록 인도네시아에 대한 내 사랑은 더욱 더 커져가는 듯하다. 오늘도 나는 그 품 안에 안길 날을 기다리고 있다.
 
벨라루스 대사관 관계자들에게 한국-인도네시아 문화를 소개하며.(사진=조인정)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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