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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171) 오, 말리오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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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013회 작성일 2021-02-0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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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말리오보로
 
시. 채인숙
 
맨발의 마부들이 낡은 말채찍을 손에 쥔 채 잠들었다
 
하멩꾸부워노 왕조가 21세기를 다스리는 공화국 속 특별자치구
 
올해도 거리에는 서너 차례 역병이 돌았고 
종종 화산재가 회색 비로 내리지만 
 
잠에서 깬 마부는 싸구려 담배를 입에 물고 
슬픔도 연기로
가난도 연기로
분노도 연기로
치욕을 삼키는 것과 
연기를 삼키는 것은 
다를 바 무어냐고 묻는다
 
나는 거기 주저앉아 등에 일곱 개의 북두칠성 점을 가지고 태어났던 신라의 아이를 이야기해줄까 아이가 자라 사내가 되고 천관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봄날을 노래해줄까 술 취한 저를 천관의 집 앞으로 데려간 말의 목을 베고 허허로이 돌아서는 사내를 불러 세워 낙랑주법으로 빚은 신라주나 한잔 마시자고 권해볼까
 
오, 말리오보로
발굽을 내리치는 말들의 울음이 찢어질 뿐
맨발로 왕궁을 드나들던 마부의 낮잠은 거룩하고
신라의 무덤 위에는 오늘도 속절없는 햇볕이 내려 앉겠지만
 
(사진=조현영/manzizak) 
 
시작노트: 족자카르타는 아직 왕정이 살아있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특별자치구이다. 그 도시의 중심에는 술탄이 살고 있는 왕궁으로 이국의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마부들이 여즉 줄지어 있다. 팬데믹이 세상을 정복한 뒤로 낯선 사람들과 어깨를 걸치며 걷던 그 거리엔 행인을 찾아보기도 힘든 지경이지만, 마부들은 하릴없이 거리에 나와 텅 빈 길가에 말을 세우고 태연히 잠들어 있었다. 그이들 옆을 걸어 지나면서, 엉뚱하게도 신라의 유신이 술 취해 잠든 사이 기생 천관의 집으로 홀로 걸어갔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이 유신을 태우고 텅 빈 말리오보로 거리를 천천히 지나는 밤을 상상했다. 팬데믹이 안겨 준 잠깐의 몽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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