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종교와 가난의 절묘한 조화: 루아르 바땅(Luar Batang) > 인문∙창작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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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37) 종교와 가난의 절묘한 조화: 루아르 바땅(Luar Bat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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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380회 작성일 2018-05-18 09:52

본문

 
 
 
종교와 가난의 절묘한 조화: 루아르 바땅(Luar Batang)
 
노경래
 
 
속이 메스껍다. 몇 번 이곳에 와 보았지만, 이번에도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시궁창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견디기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놀이터 삼아 밝게 웃고 있는 마을 아이들이나 평온한 표정으로 모스크에 앉아 있는 주민들로 인해 자꾸 뒤돌아보게 되었다. 이렇게 루아르 바땅(Luar Batang)은 나에게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주는 동시에 잡아 끄는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루아르 바땅 위치>
 
루아르 바땅 마을(Kampung Luar Batang)은 자카르타의 대표적인 수상가옥이면서 슬럼가이다. 면적은 131,500m2이며, 인구는 약 8,000명이고 이중 무슬림이 약 92%라고 한다.  자카르타 시내를 관통하는 강 중에서 가장 큰 강은 찔리웅(Ciliwung, 119km)이다. 이 강은 아주 오래 전의 화산 활동으로 생긴 서부 자바의 빵그랑고 산에서 발원하여 보고르를 거쳐 북부 자카르타의 루아르 바땅에서 바다와 만나 순다 끌라빠 항구로 흘러간다.
 
<루아르 바땅 전경>
 
중부 자바에서 발원하여 동부 자바의 바다로 흐르는 솔로강이 많은 노래와 시에서 등장하는 강이라면, 찔리웅은 순다족과 버따위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흐르는 강이다. 찔리웅 강물이 루아르 바땅에 가까워질수록 좀 더 검은색의 강물이 서서히 흘러 내려오면서 - 예전보다 점차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 비릿한 냄새를 뿜어낸다.
 
<루아르 바땅 배치도>
 
루아르 바땅 마을은 VOC(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02–1800년)에 의해 매립되었다. 당시 이 지역은 진흙더미를 파내는 자바 출신 노무자들의 거처로 쓰였기 때문에 ‘Kampung Jawa’라고 불렸다. VOC에 고용된 이들은 찔리웅 강 어귀의 수심이 낮아져 배들의 운항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진흙더미를 파내고 수로를 청소하는 일을 했다.
이 지역을 변화시킨 퇴적과정의 사진(Widyarko 작성)을 보면, 이 지역은 18세기가 되어서야 VOC가 작성한 지도 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립루아르 바땅 퇴적과정>
 
훗날에 ‘Kampung Jawa’는 ‘Kampung Luar Batang’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이 마을이 배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찔리웅 강어귀에 띄워 설치한 통나무(batang)의 바깥(luar) 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순다 끌라빠 항구에 들어오는 배들은 오늘날로 치면 엄격한 통관심사를 받아야 했다. 이 심사를 받는 동안 선원들은 진흙더미를 파내는 노무자들의 거처에서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다. 체류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임시 오두막이 세워지고 점차 마을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도로, 상하수도, 주택 등의 물리적 환경이 정상적인 필요조건에 미달하는 지역을 칭하는Kampung은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1840년 이후 원주민들의 주거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여 왔으나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을 의미하게 되었다. VOC 지배 동안에 루아르 바땅 마을에는 네덜란드 식민 시스템 구축에 동원된 중국인과 아랍인들이 소수 정착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사실상의 하층계급인 원주민들이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루아르 바땅 마을의 이름과 관련하여 이 지역 주민들은 예멘 태생의 무슬림 선교사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문의 일원이라고 알려져 있는 하빕 후세인(Habib Husein)과 관련짓는다. 그는 1736년 루아르 바땅에 도착하였다. VOC 총독이 순다 끌라빠 서쪽의 조그마한 땅을 하빕 후세인에게 주었다. 초자연적인 힘을 가졌다고 알려진 그는 루아르 바땅 지역에 모스크(‘Masjid Luar Batang’)를 건립(1739년)하고 바따비아 북쪽 지역의 무슬림들을 이끌었다.
 
<모스크>
 
 
1756년 그가 죽자 신자들이 그를 당시 공동묘지가 있었던 따나 아방에 묻으려고 관(Kurung Batang)을 열어 보니 그의 시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원래 장소로 돌아가 있었다고 한다. 3번이나 그를 다시 관에 넣어 따나 아방에 묻으려고 했는데, 그의 시신은 원래 장소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를 현재의 위치에 묻기로 하고 그 위치를 Luar Batang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 ‘Luar’는 ‘밖’을 ‘Batang’은 버따위어로 ‘시신’을 뜻하니 ‘Luar Batang’은‘(관) 밖으로 나온 시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Husein 무덤>
 
 
그의 무덤(사진)은 원래 모스크 밖에 있었으나, 모스크가 확장되면서 모스크 안에 안치되어 있다. 자카르타 및 인근 지역 무슬림들이 다른 지역의 이슬람 성지보다 하빕 후세인 무덤에 가장 먼저 순례한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수호자이고 선지자  무함마드의 친인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아르 바땅 마을, 모스크, 그 안의 하빕 후세인 무덤을 보면, 누구나 삶과 종교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홍수막이 공사와 매립이 많이 진행되어 예전의 수상가옥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이곳의 전형적인 수상가옥은 일정한 건축 스타일이 없으며, 앞마당과 뒷마당도 없다. 합판, 모르타르, 함석, 벽돌 등에 이르기까지 집을 짓는 재료가 다양하다. 보통 1층은 가족 모임, 부엌, 욕실 또는 구멍가게로 사용되는 반면, 위층은 침실과 같은 개인 용도로 사용된다고 한다. 
 
<수상가옥>
 
루아르 바땅 마을의 주요 진입로는 현재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으나, 뒷골목은 여전히 두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비좁다. 이곳 주민들은 의자를 골목길에 내놓고 앉아 이웃 사람들과 담소하고, 구멍가게 주인들은 그들의 진열장이 비좁아 물건들을 골목길에 내놓고 팔고 있다.
 
이곳 주민들의 상당수는 순다 끌라빠 항구나 무라아 앙께에서의 노무자, 어부나 선원으로 일하거나 일상 생활용품을 파는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이곳 모스크에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거나 순례 의식을 도우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루아르 바땅 마을에는 공공장소가 없기 때문에 모스크 주변의 열린 공간이 시장, 주차장, 사회활동 등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루아르 바땅의 모스크나 무덤을 순례하는 무슬림에게는 반드시 구걸하는 아이들이 뒤따라 붙는다.  모스크나 무덤 순례자들이 구호금을 줄 때까지 끈덕지게 따라 붙는다. 순례자들은 자신들이 모스크와 무덤에서 받은 축복의 보답으로 모스크 앞 열린 공간에서 모스크 관리들로 하여금 자신이 준 자선금을 나누어 주도록 한다.
 
주민들은 모스크로 가는 순례자들에게 조화(造花), 자그만 우산, 향, 성수(聖水) 등을 판다. 물론 이들은 이것이 모스크에서 기도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물건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물건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모스크에 있는 순례자의 방까지 안내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곳 주민들의 매일매일 수입은 상당 부분 순례자들 또는 관광객들의 지갑에서 나온다. 
 
목요일 저녁에 모스크 주변에는 부산한 야시장이 열린다. 이때는 공공장소가 사적인 상업공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선지자 무함마드 탄신일이나 하빕 후세인의 기일 등 매년 이슬람력에 따라 개최되는 날에는 연례 바자(bazaar)가 열린다고 한다. 연례 바자는 매주 목요일 야시장이 열리는 같은 공간에서 열리지만 훨씬 더 큰 규모로 열린다고 한다.

연이은 행사들이 있기 때문에 루아르 바땅 마을 주민들은 어렵지만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있어 시장이 있고, 시장이 있기 때문에 종교가 존립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종교와 시장의 공존인 셈이다.

이곳 주민들의 삶이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고 해야 하나, 신성한 모스크와 이슬람 성인의 무덤이 있고 많은 무슬림들의 순례 장소라면 당연히 이곳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곳을 불도저로 확 쓸어버리고 - 현재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빠사르 이깐 지역처럼 - 자바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초고층 아파트와 럭셔리한 쇼핑몰을 지을 생각을 하는 비즈니스맨과 공무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 사람들에게 평등이라 함은 집 높이와 크기가 그만 그만하고,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인사하는 정치인들에게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일까. 혹은 알라의 사랑을 공평하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 알라를 불평하지 않는 것일까.

이곳 사람들에게 자유라 함은 그런 집에서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다. 밑으로는 더러운 강물이 흐르는 수상가옥의 찌그러진 창 너머로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서 사는 꿈을 꿀 수도 있다. 아니면 순다 끌라빠 항구에서 배를 타고 고래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가는 꿈을 꿀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 다시 루아르 바땅 마을을 다시 들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바라건대, 찔리웅강 어귀를 흐르는 강물에 고기들이 뛰어 놀고, 갈매기들이 힘차게 날아드는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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