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52)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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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최장오
짧지만 긴 하루를 대면하는 시간이다
잠으로 반쯤 감긴 눈을 들어 쉐이빙 폼을 듬뿍 바른다
라벤더향이 코끝을 스치며 잘 발달된
더듬이처럼 턱 선을 더듬는다
웃고 찡그리고 째려보며 구석구석을 크로키 한다
아침마다 그린다
맑을 때나 흐린 날도 어김없이 자화상을 그린다
유일하게 너를 보는 시간
사내들이란게 그렇다
거울에 제 얼굴을 들이밀 일이 흔치 않다
숙련된 조각가의 손길로 방점을 찍으면
파르스름 피 한 방울,
스무 살 무렵부터 시작된 일상이다
깊어지는 주름과 희고 거친 머리칼이 낯설다
습기 먹은 거울을 손바닥으로 훔치면
고집스런 얼굴이 나타난다
할아버지 제삿날
잿빛 두루마기 차려 입은 아버지가 거기에 있다
시작 노트**
매일 아침 똑같은 동작으로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한다.
어느 날인가 거울 속에 내가 아닌 낯선 이가 보였다.
아버지와 아빠의 차이를 깊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를 부르며 살아온 시간과 아빠로 불리며 살아온 시간들을 헤아려 보았다.
그 흔한 농담과 웃음기조차 없이 엄하기만 하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닮을까 노심초사하여 친구 같은 아빠가 되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시간들……
하지만 거울 속의 낯선 이는 아버지인지 나인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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