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61) 가는대로 간다 / 때마침 바다를 건너는
페이지 정보
인문과 창작
본문
가는대로 간다
박정자
일을 접고 만남을 줄이고 한적한 들녘이 되어 먼 산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줄기는 결 따라 흐르고 백양나무 숲은 반짝이고 구름은 산비탈 오르내리며 제 그림자를 지운다
그동안 너무 빨리 걸어 온 탓에 휘어버린 발가락을 허공에 펼친다 일렬로 늘어선 초침소리를 발가락 각도만큼 비틀어 비단잉어 등줄기에 걸쳐 놓는다 어떻게 병 속의 새가 허공을 날 수 있는지 그 오랜 물음의 유리벽이 깨진다
풍경에는 밖이라거나 안이라는 말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멀거나 가깝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맨드라미들 모여앉아 큰 입으로 수선떨어도 신발 옆에 곤히 잠든 고양이까지 다 안다 풍경의 밖에서 풍경의 안으로 이어지는 발소리를 풍경에도 안팎이 있다는 것을
풍경의 앞과 뒤를 겹쳐서 보여주는 먼 산도 사실은 물과 나무와 구름을 밖에서 안으로 감아 들이는 것이다 느리게 가는대로 가기로 한다 병 속의 새 어떻게 유리벽을 깨뜨렸는지 묻지 않기로 한다 새로운 물음에 갇히지 않기로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때마침 바다를 건너는
박정자
1
젖으며 마르며 흔들리며
통나무 하나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에 몸을 맡기고
들며 나며 가라앉으며 솟구치며
가고 있었다, 그런 것이
순리이려니
젖으며 마르며 흔들리며
통나무 하나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에 몸을 맡기고
들며 나며 가라앉으며 솟구치며
가고 있었다, 그런 것이
순리이려니
2
굼실거리며 흘러와 저 멀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통나무 하나 물결 닮은 푸른 지느러미 흔들며 떠오를 때마다 한 줌씩 빛을 쏟아놓고 있었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언제까지 어디까지 이어질까 너의 바다는
3
짧은 눈인사로 스치는 여행지의 사람
너 그리고 나, 때마침
바다를 건너다 곁을 지나며
손 높이 흔들어 반길 때조차
우리는 통나무보다 나은 것 없어서
들며 나며 가라앉으며 솟구치며
시작과 끝은 아예 없이 지워지며
순간을 영원처럼 영원을 순간처럼
가고 있었다
굼실거리며 흘러와 저 멀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통나무 하나 물결 닮은 푸른 지느러미 흔들며 떠오를 때마다 한 줌씩 빛을 쏟아놓고 있었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언제까지 어디까지 이어질까 너의 바다는
3
짧은 눈인사로 스치는 여행지의 사람
너 그리고 나, 때마침
바다를 건너다 곁을 지나며
손 높이 흔들어 반길 때조차
우리는 통나무보다 나은 것 없어서
들며 나며 가라앉으며 솟구치며
시작과 끝은 아예 없이 지워지며
순간을 영원처럼 영원을 순간처럼
가고 있었다
(사진=조현영 /manzizak)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 이전글(62) 토바의 어부 18.11.14
- 다음글(60) 너의 아름다움이 모두 뚝뚝 묻어나길 바래 18.11.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