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72) 끝나지 않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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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독립전쟁
배동선
“일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한국인들이 이제 와서 징용자나 위안부 문제로
일본과 반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 사람들도 어차피 나중에 일본으로부터
연금을 받았을 것 아니에요?”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Historika Indoensia)라는 현지 역사협회가 2018년 독립기념일을 맞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속 한국인 투사의 역할>이란 주제로 중부 자카르타 쁘로끌라마시(Jl. Proklamasi) 거리 소재 ‘선언자의 공원’ 인근에서 세미나를 연 일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날 세미나의 초점은 일본군 군무원 신분으로 온 인도네시아에서 부대를 이탈해 독립전쟁에 참여했다가 네덜란드군에게 잡혀 동료 일본인들과 함께 총살당한 전 연합군 포로 감시원 양칠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인도네시아 중년여성 유튜버가 세미나 패널로 나왔던 사학자에게 던진 이 질문에 난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진심으로 한국인 징용자와 위안부 피해자들이 그 후 일본으로부터 연금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사뭇 수긍하는 눈치였고요. 그것은 식민주의 종주국을 바라보는 한국인들과 인도네시아인들의 시각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몰이해가 가능했는지, 서로의 역사관과 사고방식을 형성한 근현대사의 배경을 살짝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덜란드 정부가 파산한 동인도회사로부터 식민지를 넘겨받은 것이 1800년의 일입니다. 그후
1949년 주권 이양이 이루어지기까지 네덜란드 총독부는 근 200년 가까이 인도네시아 전국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을 관리와 군인들로 임용했죠. 그들 중 1949년 네덜란드 치하에서 정년을 마친 인도네시아인들은 최근까지도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례가 얼마든지 있겠지만 우리 사무실 한 여직원의 외할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연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타 식민주의 종주국 못지않게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던 네덜란드가 옛 식민지의 현지인 정년퇴직자들 연금을 자발적으로 챙겨주었던 것인지, 아니면 소송에 져 어쩔 수 없이 내주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네덜란드가 자기 정부에 봉사했던, 그러나 이미 외국인이 되어버린지 오래인 이들에게 끝까지 일말의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습니다. 이번엔 인도네시아군에서 복무하다가 독립한 조국으로 돌아간 동티모르 출신 군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시대가 저물어가던 1975년 동티모르는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맞이하는 대신 느닷없이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받아 합병당하고 맙니다. 그후 수하르토가 건재하던 시절 동티모르는 독립은커녕 최소한의 자치권도 부여받지 못했죠. 그러다가 자카르타 폭동과 수하르토의 하야로 시작되는 인도네시아 혼란기에 동티모르도 1999년 유엔이 관리한 독립찬반 국민투표를 통해 마침내 해방됩니다. 그해 인도네시아군은 24년간의 강점기를 끝내고 마침내 철수했고 동티모르는 유엔 과도정부를 거쳐 2002년 띠모르레스테(Timor-Leste)라는 같은 뜻의 다른 이름으로 명실상부한 독립국이 됩니다.
그 24년간 10만 명 이상이 학살과 기아로 목숨을 잃은 동티모르인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원한은 말할 수 없이 컸지만 그동안 적지 않은 또 다른 이들이 인도네시아로 건너와 주류사회 진입을 시도했고 그들 중엔 군인이 된 이들도 있었죠. 그리고 그중 인도네시아군에서 오래 복무하다가 조국의 독립을 맞아 동티모르로 전향해 돌아간 이들이 소송 끝에 인도네시아로부터 연금을 받았다는 기사도 전해집니다. 그러니 그런 사실을 기억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게 징용자와 위안부 등의 이름으로 동원되었던 한국인들도 당연히 연금과 같은 응분의 보상을 받았으리라 생각하는 건 대체로 자연스러운 사고의 전개일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도대체 뭘 안다고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징용자와 위안부 할머니들을
입에 담는단 말이요?”
그 아줌마 유투버의 질문을 듣고서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만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셈이고, 우리 역시 그들이 우릴 모르는 것 이상으로 인도네시아의 역사감정에 무지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린 가끔 350년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을 경험한 후 곧바로 3년 반의 일본강점기를 맞았던 인도네시아에게 일말의 연민과 동료의식을 느끼며 우리의 반일 감정도 인도네시아인들이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을 거라 기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는 일입니다.
인도네시아를 철권으로 다스리던 네덜란드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면서 1942년 인도네시아에 상륙한 일본군에게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은 대체로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진주와 함께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수카르노는 이렇게 일본을 찬양하기까지 했어요.
“알라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마침내 나에게 길을 보여주셨다. 그렇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오직 대일본제국의 힘을 빌려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난생 처음 나는 스스로를 아시아의 거울에 비쳐볼 수 있었다.” – 신디 아담스의 수카르노 자서전-
서구열강을 물리친 일본군에 매료된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은 일본군 보조부대인 헤이호(兵補),
PETA 조국수호단같은 준군사조직에 수만 명 단위로 자원입대해 훗날 인도네시아군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강제징집되어 남방전선으로 끌려왔던 한국 학도병들의쓰라린 마음을 이해할 리 없습니다.
양칠성과 그의 일본인 동료들처럼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현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일본군 출신들은 당연히 인도네시아인들의 감사의 대상입니다. 앞서 언급한 세미나를 열었던 히스토리카는 올해도 독립기념일을 즈음한 8월경 양칠성이 묻힌 서부 자바 가룻(Garut)에서 또 한 번 세미나를 열어 그와 동료들의 독립전쟁 당시 활동을 조명할 예정이라 합니다.
3년 반의 일제강점기는 상대적으로 짧았지만 로무샤(노동 징용자)와 헤이호는 많은 인명피해를 냈고 가공할 규모의 수탈이 이루어지는 등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친일부역’이라 할 만큼 당시 일본에 적극 협력했던 수카르노가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일본에 대한 나쁜 인상들이 묻히고 호의적 기류가 압도적으로 흐르게 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고 한국보다 빠른 1958년 대일청구권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청구권 자금과 함께 내로라하는 일본 기업들이 대거 들어와 인도네시아의 초창기 경제 인프라 건설부터 참여했으며 1962년 일본여인 네모토 나오코가 랏나 사리 데위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받아 수카르노의 여섯 번째 아내가 되면서 일본은 인도네시아에서 한발짝 더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게 됩니다.
한편, 한국이 인도네시아와 수교한 것이 1973년이었고 현지 투자가 시작되는 것은 그 후의 일입니다. 그러니 인도네시아인들이 일본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는 셈이며 그들의 감정이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과 절대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와 같이 독립전쟁을 통해 식민종주국을 몰아낸 아시아의 과거 피식민국가들과 달리 자력으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내지 못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김창용, 노덕술로 대변되는 친일파들의 권토중래를 막지 못한 결과 일국의 극우가 뜬금없이 친일과 맞닿는 이상한 사회정치적 상황을 초래했고 최근 징용자 배상문제, 위안부 사과문제, 일본 초계기 사건 등 회개하지 않는 일본을 이웃으로 두고 심심찮게 충돌하는 지금 우리의 독립전쟁은 사실상 아직 끝난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린 올해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습니다. 본국은 물론 교민사회에서도 대사관과 한인회 차원의 다양한 프로그램들과 행사들이 준비되고 있지만 특정국가에 사는 재외국민들이 그곳에 살기 때문에 거기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기념방법도 분명 있을 터입니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양국이 역사적 포지션의 차이점을 서로 이해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식민지 시대 인식의 온도차와 오해를 학회교류나 세미나, 관련책자 번역 및 발간과 소개 등을 통해 하나씩 불식시키고 이해를 증진시키려 노력하는 것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리고 끝나지 않은 독립전쟁을 수행해 가는 의미있는 방법이 되리라 믿습니다.
* 이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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