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76) 전철 안 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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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안 도토리
김현숙
교외로 달리는 한적한 전철 안
도토리 하나가 구르기 시작했다
이쪽 저쪽으로 사람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움직였다
전철이 출발하면 뒤로, 멈추면 앞으로
아낙의 큼직한 배낭에서
주위를 살필 새도 없이 구르기 시작한 도토리
또로로……
무료함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도토리를 굴린 저 아낙
민망함을 곁눈질로 감추며
도망치듯 다음 역을 빠져나간다
열차는 신나게 뒤뚱거리고
도토리는 사선을 그어대고
엇갈리는 선과 파장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차창 너머 획 지나가는 붉은 산
붉은 산을 쫓는 쪽빛하늘
뭉게구름은 산과 하늘의 경계선을 따라 비행한다
흔들리는 손잡이에
휘청대는 몸의 중심을 잡고
동선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열차는 주엽역을 떠났다
내 안에 불시착한 도토리,
제멋대로 한참 사선을 그어댔다
***시작노트
한창 깊던 서울의 지난가을, 지인을 보러 가다 만난 전철 안 도토리.
당돌하리만치 전철바닥을 맘껏 굴러대던 그가 내 인생의 여정에 파문을 던졌다. 이미 그려진 동선을 이탈하지 않으려 애쓰는 나의 모습을 안쓰럽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불안한 기관사다. 열차가 철로를 이탈할까 두려워 한눈을 팔지 않는다. 도토리가 그린 사선만큼은 언감생심이지만 그 도토리 크기만한 여유와 일탈을 언제나 꿈꾸며 산다.
*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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