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소식 "3·1 운동 정신 되짚자"…한-인도네시아 전문가 공동 세미나 한인단체∙동호회 편집부 2019-03-0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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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서 열린 3·1 운동 100주년 기념 세미나
4일 오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내 아트마 자야 대학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적 항거였던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역시 일본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인도네시아에서 양국 국민의 항일투쟁을 소개하고 3·1 운동의 의미를 되짚는 자리가 마련돼 눈길을 끈다.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과 한국문화원은 4일 오후 자카르타 아트마 자야 대학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세미나'를 개최했다.
한-인니문화연구원이 주관한 이날 세미나는 3·1 운동이 세계 각지의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과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일제에 대한 저항 활동을 조명하는 데 중점을 뒀다.
발표자로 나선 인도네시아 한인사 연구가 김문환 칼럼니스트는 1944년 12월 29일 중부 자바 주의 한 산에서 조선인 군속들이 결성한 비밀결사 고려독립청년단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10명의 조선인 군속이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썼다. 이 중 3명은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만에 중부 자바 암바와라 지역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일본군에게 포위되자 자결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단원들은 연합군 포로들과 함께 싱가포르로 출항하는 일본 수송선을 탈취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무산됐다. 이들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실형이 선고됐지만 같은 해 일제가 패망하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로스티뉴 국립 인도네시아대학(UI) 한국어학과 교수는 "인도네시아에서의 일제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매우 먼 거리에 있었고, 성공 가능성을 생각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도 그들이 이런 저항에 나선 것은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독립을 원했고, 지역적 차이가 이들의 민족주의 정신을 억누를 장벽이 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현지 역사연구 재단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Historika Indonesia)의 창립 멤버인 언론인 헨디 조는 "1942년 3월 일본군이 진주했을 때 인도네시아인은 350여년간 이어진 네덜란드 식민통치의 쇠사슬을 끊은 은인으로 환영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일본군은 본색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수확한 식량을 빼앗은 것은 물론 남성은 강제 노역에 동원하고 여성들은 종군 위안부로 끌고 간 것이다. 일본이 설립한 군사기구인 페타(Peta)에 징용됐던 청소년들은 차별과 가혹 행위를 참지 못하고 거듭 반란을 일으켰다.
헨디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항거는 일본 군정을 떨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일제 패망 이후 인도네시아는 자국을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4년간 전쟁을 벌인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이 전쟁에는 조선인 군속 출신 한국인도 다수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일각에선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으로 추앙되는 한국인 양칠성 씨의 이름을 그가 붙잡혀 총살된 서(西)자바 주 가룻 지역의 도로에 붙이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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