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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와 일제의 침략
유럽인들이 인도네시아에 관심을 가진 것은 향신료(spices)를 찾으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식민지 개척을 처음 시작한 포르투칼 사람들은 1522년 순다 끌라빠(Sunda Kelapa) 항구 에 도착하여 이를 거점으로 삼았다. 1527년에 이슬람 왕국 드막(Demak)의 술탄이 2천명의 군대로 순다 끌라빠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그리고 순다 끌라빠를 자야카르타(Jayakarta)로 고쳤는데 그 뜻은 승리의 도시(the City of Victory)였다. 네덜란드 지배기에는 바타비아 (Batavia)라는 이름으로 불려졌고 지금은 자카르타(Jakarta)가 되었다. 16세기 후반 하우트만(Hautman) 함대를 시작으로 많은 네덜란드 선박들이 인도네시아 각 지로 몰려들어 무역회사가 난립하게 되었다. 이들간의 과다 경쟁은 향료의 가격 등귀현상을 유발하였고, 유럽으로의 과잉공급은 그들의 수입을 격감시켰다. 이에 네덜란드 의회는 선박 회사들의 무모한 과다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이들 회사들을 합병시켰고, 1602년 동인도회사 (VOC)가 설립되었다. 네덜란드 의회는 VOC에게 통치권에 준하는 사법·행정·군사권 등의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총독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자바에 암스테르담을 본딴 바타 비아를 건설함으로써 인도네시아 식민통치의 토대를 닦았다. 네덜란드는 순다 끌라빠 항구를 통해 외부와 교역을 실시했으나, 네덜란드 식민지배자들은 물동량이늘어나자그전의순다끌라빠항구동쪽부근에새로운항구를만들어그이름을 딴중 쁘리옥(Tanjung Priok)이라고 하였다. 제1항구는 1877년부터 1883년에 걸쳐 만들어졌 고, 제2항구는 1912년부터 1917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제3항구는 1932년에 완성되었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고 1940년 6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이 일본 에 점령당하자, 네덜란드 식민당국은 인도네시아 내부의 대일본협조세력을 제거한다는 구실 로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 필리핀을 제압한 후 수마 트라섬 남부의 팔렘방 유전을 확보하기 위해 1942년 2월 인도네시아 지역(당시 화란령 인도) 을 침략하였다. 일본이 남방에 진출한 것은 석유와 고무 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특 히 자바지역은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의 보고였다. 1942년 3월 1일 일본군사령관 이마무라(今 村均) 중장이 지휘하는 육군 제16군 5만 5천명이 자바섬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3월 8일 동부 자바의 소도시 까리자띠(Kalijati)에서 네덜란드는 일본군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인도네시 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는 종결되었다. 이후 일본은 인도네시아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일본이 실시한 군정의 커다란 특징은 문 화·선전정책이었다. 무력만이 아닌 교육·언어·종교·문화 제 부문에도 깊이 침투하여 영 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제16군 휘하의 장병 1만 5천명, 군속 일본인 1만 3천명, 다른 군 지 휘하에 있는 자와, 전진중인 부대 5천명, 항공대 1만명, 해군 2만명 등 약 6만 3천명의 일본군 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병력은 3년 반동안 인구 5천만명의 자바·수마트라를 지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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